intro

유재덕의 직업은 합법적인 칼잡이, 즉 요리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에서 20년 넘게 일했으며, 현재는 그곳에서 메뉴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요리사’보다는 자신을 ‘음식가’ 혹은 ‘파불루머’라는 명칭으로 불러주길 원한다. ‘음식물’이나 ‘영양물’을 뜻하고, 그래서 ‘마음의 양식’ 등을 표현하는 숙어에서 종종 활용되는 라틴어 pabulum(파불룸)에서 따온 단어다.

“요리는 특별한 것이지만, 음식은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좌우명이다. 요리는 맛을 주지만, 음식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런 이유로 그는 언제나 손에서 칼을 내려놓을 때마다 책을 집어들었다. ‘파블루머 유재덕의 칼과 책’은 오늘도 그가 주방에서 읽고 있는 책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 서른여덟 번째는 <왜 맛있을까>(찰스 스펜스 지음 / 윤신영 옮김 / 어크로스)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주방은 위험한 곳이다. 다루는 것들이 뜨겁고 날카롭다. ‘욱’ 하는 심정으로 손에 든 것을 던지기라도 하면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문제는 엄격함이 지나치면 마음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는 마음을 너무 쉽게, 혹은 너무 거칠게 다루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마음이 죽으면 몸도 죽는다. 모든 약은 독이다.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죽을 수 있다. 서로의 몸을 지키고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가 오히려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간이 맞아야 하는 요리처럼 엄격함에도 적절함이 필요하다.

실수한 후배에게 야단을 좀 쳤더니 몹시 부끄러워한다. 순간 그의 표정을 살핀다. 말로만 그리 대꾸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부끄러워하는 것인지는 표정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사람은 결국 해낸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가지 터득한 것이 있다. 가르칠 수 있는 사람과 가르칠 수 없는 사람의 차이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가르는 지점이 바로 수치심이다. 내 호통을 듣고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그 후배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워? 그럼 됐어! 자네 잘 해낼 거야.”

후배에게 야단을 친 날은 내 마음도 안 좋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떨 때 부끄러워야 할까?’

부족함은 그저 더하기만 하면 된다. 요리도 그렇다. 간이 부족하거나, 덜 익은 것은 금방 해결할 수 있다. 문제는 넘칠 때다. 그것은 해결이 안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아직 가지지 못한 것들보다는 과욕을 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크게 망치는 것들도 모두 부족함보다는 과도한 욕망 때문이다. 목표를 세우고 비전을 가지려는 것과 제어되지 않는 욕망을 품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어떻게 후배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는 역시 책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을 들었다. 찰스 스펜스의 <왜 맛있을까>를 선택했다. 감자칩의 ‘바삭’거리는 소리와 인간이 감각하는 맛의 상관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괴짜 과학자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이그노벨상을 받기도 한 심리학자가 쓴 책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 속한 통합감각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하다. 이 책에 저자가 붙인 원래 제목은 Gastrophysics였다고 한다. Gastronomy(미식학)와 Physics(물리학)의 합성어다. 이것은 저자가 인지과학과 뇌과학, 심리학 그리고 여기에 디자인과 마케팅 분야까지 융합해 창안한 신종 학문 분야란다.

요리사가 직업인 나로서는 이 책이 정말 재미있었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마치 눈앞에서 그대로 펼쳐지는 듯 생생했다. 그중 하나. 뇌의 기본적인 임무 중 하나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으면 죽는 것을 구분해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리에 대한 선입견이 불가피한 이유란다. 독이 들어 있을 법한 색이나 모양의 유형을 저장해 두었다가 위험을 경고해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료나 요리의 이름도 선입견을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라고 한다. 왠지 먹으면 큰일 날 것 같은 ‘파타고니아 이빨고기’는 그 이름을 ‘칠레산 농어’ 혹은 ‘메로’로 바꾸고 나서 즉시 판매량이 10배 이상 올랐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잔뜩 등장하는 <왜 맛있을까>를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요리사에게 호통을 쳤을 때 음식의 맛은 어떻게 변할까?’ 나는 찰스 스펜스에게 이 주제도 한 번 연구해 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요리사가 되고 10년 차가 됐을 때 나는 한마디로 자신만만, 기세등등, 의기양양, 기타등등… 뭐 대충 그런 태도로 살고 있었다. 새로운 샐러드를 개발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맛이 끝내 주면서도 건강한 한 끼의 식사가 될 수 있는, 그런 ‘압도적인 샐러드’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모두 5종의 샐러드를 만들었다. 육해공, 즉 소고기·해산물·치킨까지 다 들어가는, 정말 끝내주는 샐러드를 완성했다.

나는 스승인 조형학 셰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메뉴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이제 칭찬 들을 일만 남은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요리를 맛보는 스승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스승이 나에게 눈을 맞춘다. 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 순간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요리가 뭐 이래? 맛이 다 비슷하잖아! 드레싱을 올리브 오일과 겨우 한 가지 식초로만 만든 거야?”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더 깊이 생각을 해서 만들어야지. 겨우 이 정도야? 실망이네”

나의 자신만만, 기세등등, 의기양양, 기타등등은 순식간에 먼지가 돼 날아갔다. 몹시 부끄러워하는 나를 곁에 세우고는 샐러브 만드는 법을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발사믹 비네거, 셰리 비네거, 샴페인 비네거, 레드와인 비네거, 레몬 드레싱, 올리브 오일, 포도씨 오일, 해바라기 오일, 너트 오일…. 이 수많은 드레싱을 만들 수 있는 조합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 많은 것들을 그 순간에 다 외웠다. 내가 외웠다기보다는 나의 부끄러움이 그것을 외웠다. 그날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요리의 덕목은 바로 ‘조화와 균형’에 관한 것이었다. 부끄러움이 각인한 것은 뇌에 인두처럼 새겨진다. 인간에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왜 필요한 것이지 나는 그날 깨달았다.

그날 이후 다시 20년 가까운 세월이 더 지났지만 나는 그날을 절대 잊지 못한다. 아마도 그날이 내가 진짜 요리사가 된 첫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나에게도 나를 스승처럼 여기는 친구들이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나에게 자주 묻는다. ‘나는 내 스승과 같은 스승이 될 수 있을까?’ ‘요리만이 아니라 부끄러움까지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후배들은 예외 없이 훌륭하게 성장했다. 살아서 언젠가는, 부끄러움을 깨닫게 하는 그런 요리도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