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는 배우 이경영과 관련한 유명한 ‘밈(Meme)’이 있다. 보통 악역이든 선역이든 어떤 조직의 요직에 앉아 “진행시켜”라고 일에 드라이브를 거는 장면이 많아 이를 모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다. 실제 그가 최근에 출연했던 SBS 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의 김율 작가는 인터뷰에서 “14회에서 극중 조태섭(이경영)이 김희우(이준기)를 해할 도구를 준비하라고 시키면서 ‘진행시켜’라는 대사를 한다. 이는 의도하고 넣은 대사”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이경영은 이러한 이미지를 갖고 “진행시켜”라는 대사가 등장하는 광고를 찍기도 했다. 이경영의 밈이 생겨난 이유는 그가 그만큼 많은 작품에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의 또 다른 밈인 ‘또경영’과도 이어지는데 이는 이경영이 다작을 하면서 ‘또 이경영, 또 이경영’이라는 반응들이 이어지면서 생겨났다.

실제 이경영은 최근 드라마에서 경악할 만큼의 활동량을 보여주고 있다. 딱 올해만 잘라도 지난 3월 공개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돼지의 왕’ 최석기 역을 시작으로 4월 공개된 SBS ‘어게인 마이 라이프’의 조태섭 역으로 등장했다. 6월에는 더 많다. 심지어 두 작품의 공개시점도 비슷했다. MBC ‘닥터로이어’에서 구진기를 연기한 이경영은 SBS ‘왜 오수재인가’에서는 한성범 역으로 등장한다. 둘 다 금토극으로 지난 3일 오후 10시 똑같이 시작했다.

8월에는 tvN ‘아다마스’가 기다린다. 그리고 현재 정확한 공개시점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 ‘퀸메이커’에서도 모습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그야말로 틀면 ‘또 이경영’, 틀면 ‘또 이경영’의 ‘또경영’ 밈이 현실화됐다.

그런데 더욱 기묘한 점은 나왔던 역할의 느낌이 모두 비슷하다는 점이다. ‘돼지의 왕’에서는 교장, ‘어게인 마이 라이프’에서는 정치인이다. ‘닥터로이어’에서는 병원장이고, ‘왜 오수재인가’에서는 그룹의 총수다. 설정된 한 조직의 수장을 맡으면서 하나같이 그 자리까지 올라간 과정이 부정하거나 비리투성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경영의 권모술수는 주인공이 시련을 겪는 원인이 되고, 주인공이 악을 물리치면서 가장 넘어야 하는 큰 산 중 하나가 이경영으로 설정된다.

지금까지 이경영이 극중에 맡았던 역할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매체가 2010년대에는 영화였다가 2020년대에 임박하면서 드라마로 바뀐 것뿐이었다. 2002년 미성년자 성매매 사건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긴 시간 자숙에 들어갔던 그는 2010년 언저리부터 영화로 복귀해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이 무대는 TV 드라마, OTT로 옮겨와 대체불가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60대 초반의 나이에 그 정도의 중량감과 연기력을 갖고 그 정도의 역할을 할 배우가 드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 같이 이경영과 작업한 배우들은 마치 그 역할을 위해 설계된 듯한 이경영의 연기에 이후 재회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또경영’ 현상의 한 면에는 더 이상 새로운 배우를 발굴하거나 기존 배우의 새로운 이미지를 발굴하지 않고 배우의 관성에만 의존하는 드라마 업계의 타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최근 드라마를 통틀어 장르물의 편중현상이 심화되면서 이경영을 대체할 배우를 더욱 찾기 힘들어진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황은 과정이 어떻든 간에 겹치기 출연을 넘어서 한 날 한 시에 시작하는 두 편의 드라마 모두에서 비슷한 역할로 한 배우가 출연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을 만들어냈다. 작품은 많아지고 배우는 없으니 이제 연기의 상도의는 땅에 떨어지는 분위기다. 이는 단순히 이경영을 둘러싼 문제만은 아니다.

‘또경영’이라는 단어에는 배우가 가진 입지와 동시에 그런 상황만을 만들 수밖에 없는 편의위주의 우리 대중문화 시스템의 어두운 단면이 들여다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