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살인의 추억’.

1986년 9월19일 71세 노인이 하의가 벗겨지고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되면서 시작된 화성연쇄살인은 법적으론 이미 끝난 사건이다. 마지막 10차 사건마저 공소소효가 지난 지 1년이 넘었다.

연인원 205만여명의 경찰이 동원된 가운데 2만1280명을 수사하고, 4만116명을 지문대조한 희대의 연쇄살인사건. 이제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그 사건의 몸서리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살인의 추억’ 속편이 만들어질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화성연쇄실종사건’이다.

지난해 12월14일 새벽 노래방 도우미 배모씨(45)가 실종됐다. 사건 당일 배씨는 군포시 금정역 먹자골목에서 지인과 통화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문제는 배씨 휴대전화의 전원이 화성시 비봉면 자안리에서 끊겼다는 것.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 태안읍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 불길한 예감이 들만했다.

그로부터 10일 뒤 다른 노래방도우미 박모씨(37)가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에서 친구와 통화한 뒤 행방불명됐다. 그녀의 휴대전화 음성메시지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도 화성시 비봉면이다. 이때부터 세상이 술렁거렸다. 죽음의 공포가 다시 시작된 것 아니냐며 웅성댔다.

그리고 다시 10일 뒤인 지난 1월3일 화성시 신남동 회사에서 퇴근한 박모씨(52)가 귀가하지 않아 이튿날 가족이 경찰에 신고했다. 그녀 역시 비봉면 양노리에서 휴대전화 전원이 꺼진 것으로 확인됐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살인귀가 어둠 속에서 돌아왔다며 난리가 났다.

3명 모두 화성시 비봉면 자안리 일대 반경 2㎞ 안에서 휴대전화 전원이 꺼진 뒤 연락이 끊겼다.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던 태안읍에서 불과 15~20㎞ 떨어진 곳이다.

경찰은 서둘러 1월9일 군포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차리고 매일 5~10개 중대 병력을 동원해 실종자들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진 비봉면 양노리·자안리 기지국과 비봉TG 주변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였다. 39번국도와 306번지방도, 서해안·영동·제2경인고속도로 등 실종자의 예상 동선 주변도 저인망식으로 훑었다. 지금까지 동원된 인원만 567개 중대 5만여명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휴대전화와 여성 속옷, 화장품 등 183점의 유류물을 발견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정밀감식 결과 이번 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종자들의 동선을 중심으로 방범·교통 CCTV와 AVI(교통정보수집장치)를 통해 찾아낸 용의차량 4000여대에서도 아무런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또 사건발생시간대의 비봉기지국 주변 통화자와 피해 여성 주변 인물의 통화내역 3만여건을 분석 중이지만 용의선상에 올릴 만한 인물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고보상금을 강력사건 최고인 5000만원으로 올리고 시민의 제보를 기다렸으나 이것 역시 현재로서는 별무신통이다.

이렇듯 사건이 또다시 미궁에 빠질 조짐을 보이자 경찰도 ‘장기전’에 돌입했다. 기존 200명의 수사본부 인원을 77명으로 줄이는 대신 수사요원을 정예화해 실종사건 수사에 전력토록 했다. 또 수색작업의 범위를 화성과 인접한 평택·용인·안산·시흥 등으로 넓히고 충남 5개 경찰서 및 인천 남동경찰서 등과 공조수사를 벌이고 있다. 주요 도로에 대한 검문강화 등 추가범죄 예방에도 애쓰고 있다. 21년 전 그때와 비슷한 흐름이다.

제2의 ‘살인의 추억’은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엄민용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