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김봉석 지음/예담/286쪽/1만2000원

성폭행, 납치, 묻지마 살인, 인육…. 최근 들어 갑자기 언론을 통해 쏟아지는 뉴스를 읽다보면 도대체 사람 사는 세상인가 싶을 때가 있다. 10대들의 언어를 빌리면 ‘완전 개막장’이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틀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다. ‘세상은 아름다워~’라며 살다가 뒤통수를 맞거나, 혹은 ‘애초에 세상은 더러운 곳’이라 생각을 머리에 새기고 꿋꿋이 스스로를 추스리거나….

영화평론가이자 대중문화평론가인 저자는 범죄소설의 하위장르인 하드보일드는 ‘잔혹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예방주사’라고 설명한다. “세상은 결코 당신에게 친절하지 않다. 오히려 무언가를 빼앗아 갈 가능성이 크고, 최소한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맞서기 위해서는) 내공이 필요하다. 일단 머리로 알고 그 다음은 부딪치면서 맷집을 기르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인 이유다.

하드보일드 소설들이 다루는 이 세상은 냉혹하고 비정하다. 작은 이익을 위해서, 체면 때문에 혹은 사소한 질투로 이웃을 죽이기도 하고, 바닥 없는 갱과도 같은 ‘순수한 악’에 대한 동경도 있다. 때로는 국가마저도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범죄를 서슴지 않는다.

문제는 ‘악’이 인간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근원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모든 생물중에서 인간만 같은 종끼리 제노사이드(인종학살)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 뇌의 용적은 우리보다 네안데르탈인이 컸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현생인류가 다른 인류와의 공존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일세….’(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 ‘사람이 사는 한, 거기에는 반드시 독이 스며든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바로 독이기 때문에….’(미야베 미유키 <이름 없는 독>)

때문에 우리는 악을 이길 수 없다. 일상의 범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다룬 <유골의 도시>에서 저자 마이클 코넬리는 “진정한 악은 세상에서 몰아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를 더욱 두렵게 만드는 것은 ‘짐승의 길’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에는 특별히 사악한 인간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유혹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짐승’이 되어 버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길을 보여준다.

원래 ‘달걀을 완숙하다’란 뜻을 지닌 ‘하드보일드’는 ‘비정·냉혹’이란 의미의 문학용어로 쓰인다. 즉 하드보일드는 장르가 아닌 스타일이다. 험프리 보거트의 영화로도 유명한 하드보일드의 고전 <말타의 매>에서 스페이드가 보여주는 인간 감정에 대한 무심함과 비정함이 주는 묘한 매력 같은 것이다.

돈 윈슬로의 <개의 힘>에 나오는 대사를 보자.

“저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상관없어. 신은 자네를 믿거든./ 그렇다면 신은 어리석군요.”

이처럼 세계를 시니컬하고 건조한 문체로 표현하는 스타일이야말로 대중들이 하드보일드에 끌리는 이유다.

하드보일드는 세상에 대한 절망에서 출발했다. 양차대전과 대공황이 낳은 미래에 대한 불안, 인간에 대한 불신과 회의 그리고 좌절이 하드보일드를 낳은 자궁이다. 고전적인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주인공은 일상의 사건을 풀어가자 거대한 악과 대면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설사 문제를 해결하고 누군가를 구해낸다 해도 세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드보일드의 비극적 세계관이다.

현대의 하드보일드는 여기에 중산층의 붕괴 같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더한다. 사회 시스템이 복잡해지고 붕괴의 충격이 커진 만큼 후유증으로 인한 일탈, 이유없는 악의 등 소설이 다루는 범죄의 양상도 더 쇼킹하다.

<비를 바라는 기도> <가라 아이야 가라> 등 사설탐정 커플 ‘켄지와 제나로’가 등장하는 시리즈로 현대 하드보일드의 전형을 보여주는 데니스 루헤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의 현실을 소설적으로 파고들다 보면 그 끝에 범죄 소설이 있다.”

하드보일드는 ‘세상은 막장’이란 메시지만 줄창 던질 뿐일까. 만약 그렇다면 장르가 탄생한 후 오랜 기간 하드보일드가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로렌스 블록의 <무덤으로 향하다>는 비정한 사회에서 고꾸라져 나동그라진 사람들이 조금씩 스스로를 추스리며 일어서는 과정을 그린다. ‘세상은 끔찍한 곳이지만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있는 한, 세상은 그렇게 쉽게 붕괴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와 함께.

세상이 참을 수 없이 무정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런 세상에서 주인공처럼 살아남는 용기와 행동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하드보일드의 힘”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은 정통 하드보일드부터 스릴러, 사회파 미스터리까지 저자가 꼽은 최고의 38편의 소설을 소개한다. 모두 흥미진진 하지만 일본 작품에 치우친 점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