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영화 프로젝트 <시선 1318> 중 <달리는 차은>이라는 단편영화를 촬영한 장소가 전북 부안의 곰소와 모항이다. 영화는 달리기를 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뤘다. 당시 곰소와 모항의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에 반했고,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변과 국도를 달리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머릿 속에 선하다.”(김태용 감독)

소복하게 쌓인 눈이 그림처럼 펼쳐진 외변산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부안에서 새만금, 대항리를 거쳐 채석강, 격포, 모항, 곰소로 이어지는 이 길은 변산반도 해안을 아우르는 드라이브 코스다. 저녁 노을에 붉게 물든 어촌과 해변, 갯바위와 포구, 바다 물결에 맞춰 출렁이는 연봉들. 쉼 없이 펼쳐지는 풍광이 아찔하다.

부안군 진서면에 자리한 곰소는 변산반도와 선운산 사이로 깊숙이 파고 든 곰소만(줄포만)을 끼고 있다. 갯벌과 바다가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으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젓갈과 천일염은 명성이 자자하다.

김 감독은 “촬영이 끝난 뒤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곰소와 모항을 방문했다. 명품 젓갈을 맛보고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식당에서 젓갈 정식을 시키면 15가지의 젓갈이 나오는데 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곰소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촬영했던 곳이라 좋아하지만 사실은 젓갈에 더 반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항구로서 생명을 다한 곰소항은 제방을 따라 어시장이 길게 이어진다. 곰소는 1938년까지만 해도 섬이었다. 본래 이름은 웅연도(熊淵島)다. 변산팔경 중 제1경인 웅연조대(熊淵釣臺)가 꼽힌다. 이는 곰소 앞바다 대죽도·소죽도 넘어 고창 선운산의 아름다운 정경과 칠산바다 어선들의 불빛이 바닷물에 어리는 풍광을 아우르는 말이다.

곰소항에서는 싱싱한 횟감보다, 군침을 흘리게 만드는 젓갈이 손꼽힌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젓갈가게가 이곳에 밀집돼 있다.

곰소에서 ‘공무원 젓갈’을 운영하는 황금옥씨는 “젓갈의 매출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전국 최고의 맛은 여전하다”며 “곰소 젓갈 축제가 열리면 가게마다 젓갈이 동이 난다”고 말했다.

잡것을 섞지 않고 자연 발효와 오랜 숙성을 거쳐 탄생하는 젓갈은 인근 곰소 염전의 천일염으로 만들어 감칠맛이 더하다. 젓갈과 더불어 유명세를 타는 것이 천일염. 곰소는 <만기요람(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들이 집약)>에 ‘전통 소금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으로 소개돼 있다. 현재는 전국 생산 면적의 1% 정도로, 규모는 작다. 하지만 이곳 천일염은 미네랄이 풍부하고 짠맛보다 단맛이 강해 고급으로 대접받고 있다.

소설가 김훈이 <자전거 여행>에서 “짠맛은 바다의 것이고, 향기는 햇볕의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날, 뜨거운 폭양 아래서 짜고 향기롭고 굵은 소금이 익는다. 가장 고통스런 날에 가장 영롱한 결정체들이 염전 바닥에 깔린다”고 표현한 그 천일염이다.

영롱한 결정체 대신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곰소 염전을 둘러보고 모항으로 간다. 모항은 변산면 도청리 남쪽 끄트머리에 둥지를 튼 자그마한 어촌이다. 곰소에서 해안을 따라 15㎞ 거리. 반달모양의 모항해수욕장이 특히 예쁘다.

김 감독은 “당시 부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촬영했는데, 영화 속 주인공 ‘차은’의 집이 모항에 있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의 배경도 모항이었다. 그 작품의 촬영감독이 <달리는 차은>의 박홍렬 감독이다. 모항의 아름다운 풍광을 먼저 본 박 감독이 나에게 추천해 촬영지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모항으로 가는 30번 해안도로는 서해안에서도 아름답기가 으뜸이다. 산령과 해변을 양쪽에 끼고 굽이치는 이 길은 눈길 주는 곳마다 고즈넉한 포구와 기암절벽, 아늑한 해변이 마술을 부리듯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유홍준 교수는 “격포에서 모항을 지나 내소사를 거쳐 곰소로 가는 길은 환상의 해안 드라이브 코스”라고 극찬한 바 있다.

큰 길에서 포구로 향하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구불구불 시골길이 이어진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의 이 길은 양쪽으로 낮은 집들이 정담을 나누듯 마주하고 있다. 모항마을 주민은 60여 가구 100여 명. 대부분 뱃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낡은 목선이 즐비한 포구를 지나 방파제로 향하니 앙증맞게 생긴 초록색 등대가 반긴다. 오른쪽 언덕에는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팽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마을 사람들조차 수령을 알지 못하는 고목은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 등장했던 ‘소원 나무’다. 모진 해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백 년을 버텨온 나무는 자태가 반듯하다.

모항 앞바다는 변산 반도에서도 청정해역을 자랑한다. 철마다 맛볼 수 있는 해산물도 다양하다. 늦겨울부터 초여름까지는 주꾸미철. 주꾸미가 떠난 바다는 대하, 꽃게, 멸치, 갑오징어, 꼴뚜기가 대신한다.

마을 주민들은 “모항은 변산반도에서도 가장 깨끗한 수질을 자랑하는 청정해역”이라며 “이곳에서 잡히는 멸치는 전통방식 그대로 멸치젓으로 만들어져 그 맛이 전국 최고”라고 입을 모은다.

국내에서 가장 늦게 해가 지는 모항은 1999년 12월31일 ‘새천년을 잇는 영원의 불씨’를 채화한 곳. 마을 뒤편에는 천연 기념물로 지정된 호랑가시나무가 군락을 이뤄 운치를 더해준다. 모항 주민들은 호랑가시나무 가시를 뜯어 명태에 꽂아 걸어두면 악귀를 쫓는다고 믿고 있다.

김 감독은 “모항은 영화에 대한 기억이 또렷한 곳이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 차은이 뛰는 장면이 많았다. 그래서 해변과 도로가 화면에 많이 잡히는데, 모항과 주변 풍광이 여주인공과 너무 잘 어울려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사실 여행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영화 촬영차 지방을 방문하는 것이 곧 여행이라는 그는 “여행은 자기 발견에 최고다. 나는 여행을 갈 때 항상 시나리오 작업 등의 일을 가지고 간다. 나에게 있어 여행은 ‘숙제를 해결하는 도서관’과 같다”고 말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 <만추> 등을 연출했던 김 감독은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6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라는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판타지 영화에 도전한다.

시인 안도현은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아는 것”이라고 했다. 변산반도 앞바다로 검붉은 태양이 빨려 들어간다. 황홀한 낙조를 등지고 해변을 달리는 차은의 모습이 멀리 신기루처럼 다가온다.

■귀띔

채석강·내소사·줄포 갯벌 습지 등 볼거리 풍성

■찾아가는 길 : 서울→서해안고속도로→줄포IC→30번 국도→모항&곰소

■주변 볼거리 : 줄포 갯벌 습지, 매창공원, 반계 선생 유적지, 신석정 고택, 채석강, 내소사, 개암사, 월명암, 의상봉, 직소폭포, 위도, 변산 온천, 새만금 방조제, 영상테마파크, 우금산성, 솔섬 등

■먹거리 : 곰소의 대표적인 음식은 젓갈이다. 이를 반찬으로 삼은 젓갈 정식집이 많다. 또 백합죽, 바지락죽이 유명하다. 곰소쉼터횟집(063-584-8007), 원조해물칼국수(063-582-0114), 칠산꽃게장전문점(063-581-3470) 등

■변산 마실길 : 새만금전시관에서 격포항까지 18㎞. 새만금 전시관에서 송포갑문까지 1코스, 송포갑문에서 성천갑문까지 2코스, 성천갑문에서 격포항까지 3코스로 나뉜다.

■숙박 : 대명리조트(063-580-8800) 외에 해안선을 따라 펜션이 제법 많다. 이중 모항과 줄포 사이에 자리한 변산바람꽃펜션(063-584-2885)은 캐나다산 통나무로 지은 복층식 펜션으로 오션 뷰가 뛰어나다. 변산반도 펜션연합회(www.byeonsannet.kr) 참조. 채석강에 자리한 스타힐스호텔(063-581-9911)은 굿스테이로 지정된 곳으로 오션 뷰가 좋고 깔끔하다. 이외에 모항비치랜드(063-583-9886), 모항레저장(063-584-8867), 모항식당(063-582-8920) 등

■문의 : 부안군청 문화관광과 (063)580-4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