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용 전 축구대표팀 감독(48)은 단상에 올라 스크린을 묵묵히 바라봤다. 여기에선 러시아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치른 3경기가 축약돼 흘러나왔다. 월드컵 직후 외부와의 접촉을 2개월 가까이 피했던 그가 처음 공식석상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신 감독은 31일 세종대에서 진행된 ‘2018 한국축구과학회 컨퍼런스’에서 이용수 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의 대담자로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월드컵 뒷 얘기와 속사정을 털어놨다.

■조현우는 국내부터 선발 낙점

신 감독은 월드컵에서 자신이 내린 결정에서 조현우(27·대구)의 선발 기용에 가장 만족했다. 사실 조현우가 경험과 경험이 앞선 김승규(빗셀 고베)와 김진현(세레소 오사카)를 제치고 월드컵 주전 골키퍼로 뛸 것이라 예상한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신 감독은 스웨덴과의 첫 경기부터 조현우에게 골문을 맡기며 월드컵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만들었다. 신 감독은 “(조)현우의 선발 출전은 사실 6월 1일 전주에서 열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평가전 직후 결정을 내린 것”이라며 설명했다. 당시 조현우는 직전 경기였던 온두라스전에서 90분 무실점을 기록한 반면 김승규가 출전한 보스니아전에선 3골을 내줬다. 신 감독은 “보스니아에 내준 3골에서 앞에 내준 2골은 막아내야 하는 골이었다”며 “김해운 골키퍼 코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한 경기 뿐만 아니라 다른 경기를 살펴봐도 조현우가 더 낫다는 생각에 교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조현우는 신 감독의 기대에 걸맞는 활약을 펼치면서 한국 최고의 골키퍼로 발돋움했다. 조현우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도 와일드카드로 참가해 2회 연속 금메달을 눈앞에 두고 있다.

■멕시코전은 통한의 오심…독일전은 16강 보였는데

신 감독은 러시아월드컵 3경기를 돌아보면서 멕시코전과 독일전에서 한 가지씩 아쉬운 장면을 손꼽았다.

1-2로 패배한 멕시코전은 역시 기성용(뉴캐슬 유나이티드)가 뒷발을 채이는 반칙에 공을 뺏긴 직후 실점한 장면이 여전히 아쉽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 도입한 비디오 판독(VAR)으로 잡아냈어야 할 장면이었다. 만약 노 골로 처리가 됐다면 한국은 1승1무1패로 16강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신 감독이 너무 얌전했던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신 감독은 “영상에는 안 잡혔지만 벤치에선 대기심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묵살당했다”며 “기성용도 주심에게 항의했지만 ‘한 번만 더 이야기하면 경고를 준다’고 했다더라”고 말했다.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독일을 2-0으로 무너뜨린 경기도 아쉬운 순간은 있었다. 종료 직전 손흥민(토트넘)의 극적인 쐐기골로 16강 진출의 경우의 수였던 2골차 승리를 확정했을 때였다. 신 감독은 “같은 조인 스웨덴과 멕시코의 경기를 처음 벤치에서 확인했다”며 “‘3-0입니다’는 답이 나오길래 ‘올라가는 구나’고 웃었다. 그런데 ‘스웨덴이 3-0’이라고 했다. 우리의 월드컵 도전이 끝났다”고 말했다.

■장현수 비판에 가슴 아팠다

한국 축구를 책임지는 사령탑으로 결과보다 가슴이 아팠던 순간도 있었다. 이번 월드컵부터 도드라진 선수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다. 특히 국민 욕받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수비수 장현수(도쿄)가 아픈 손가락이었다.

신 감독은 “멕시코전 다음 날 장현수를 부르니 ‘한 숨도 못 잤다. 독일전은 안 뛰었으면 한다’고 답하더라”고 떠올렸다. 기성용이 부상으로 뛸 수 없는 상황에선 큰 타격이었다.

신 감독은 숨김없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해 바닥까지 무너졌던 장현수를 끌어 올렸다. 신 감독은 “현수를 만나 ‘SNS(사회관계망서비스)는 보니? 보는 순간 넌 자살할지도 모른다. 난 너보다 더 심하다. 우린 돌아가면 한국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으니 미련없이 대표팀에서 물러나자’고 말했다. 그날 오후에 현수가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해줬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장현수는 수비수가 아닌 미드필더로 무난한 활약으로 2-0 승리의 디딤돌을 놨다. 파울루 벤투 신임 감독이 장현수를 수비수가 아닌 미드필더로 소집한 배경이기도 하다.

신 감독은 “사실 팬들이나 언론이 선수의 실책에 질책을 할 수도 있지만,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우리 선수들은 월드컵 가기도 전에 너무 힘들게 떠났다. 그런 부분이 앞으로 한국이 큰 대회에 도전하는데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카타르 준비는 더 빨리…신태용은 당분간 쉰다

신 감독은 자신의 후임인 벤투 감독의 성공을 빌면서 한 가지 당부도 잊지 않았다. 러시아월드컵에선 역대 어느 대회보다 훌륭한 지원이 있었지만, 그 지원이 시작되는 시기를 조금만 앞당겼으면 했다.

신 감독은 “러시아월드컵에선 대한축구협회의 훌륭한 지원에 큰 힘을 얻었다”며 “아쉬운 대목은 우리가 월드컵 본선 조 추첨이 확정된 지난해 12월부터 움직인 것과 달리 라이벌들은 늦어도 2년 전부터 움직인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팀들은 본선에 간다는 전제 아래 움직인다고 느꼈다. 일본은 아예 4년 전부터 준비하더라”고 덧붙였다.

신 감독은 그 차이를 월드컵 베이스캠프부터 확인했다. 오스트리아 레오강 전지훈련지는 환경은 뛰어났지만 비엔나 공항에서 5시간을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평가전이 열리는 잘츠부르크도 2시간을 넘게 움직여야 했다. 신 감독은 “이 부분을 더 신경쓰면 벤투 감독은 조금 더 쉽게 카타르월드컵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 감독은 자신의 향방을 둘러싼 세간의 시선에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놨다. 신 감독은 대표팀 감독직 유임과 일본 J리그 감독 제의 등 다양한 선택지를 거절한 채 재충전에 나섰다. 신 감독은 “올해는 푹 쉴 계획”이라며 “언젠가 지도자로 돌아갈 그 날을 위해 계속 공부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