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싸워온 제2의 남현희가 다시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26년 동안 어려움을 해결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후배 양성에 모두 쏟겠다.”

‘땅콩 검객’ 남현희(39)가 펜싱 아카데미 원장으로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남현희는 지난 6일 서울 강남구에 ‘남현희 인터내셔널 펜싱 아카데미’를 열었다. 26년 선수 생활을 지난해 말 마무리한 뒤 사회를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다. 남현희는 지난 11일 아카데미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아카데미를 설립한 이유에 대해서 “제2의 남현희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현희는 한국 여자 펜싱의 개척자다. 작은 체구(키 154.7㎝·체중 45㎏)에서 오는 신체적 불리함, 국내용 선수라는 편견을 뚫고 한국 여자 펜싱 선수로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을 따냈다. 펜싱 강국 선수들처럼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 지도자도 없었다. 부상에도 강한 훈련을 오롯히 감내했고 부상 치료도 많은 부분을 스스로 해결했다. 그가 국제대회서 따낸 메달 99개는 눈물로, 땀으로, 인내로 얻어낸 값진 성과다.

남현희는 누가 봐도 성공한 올림피언이다. 그러나 남현희는 자신을 “외로운 검객”이라고 했다. 남현희는 “도와주신 분들도 많았지만 기쁘지 않은 선수 생활도 있어 은퇴한 뒤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며 “후배들이 나와 같이 힘들고 외로운 길을 걷지 않기를 바라는 뜻으로 아카데미를 설립했다”고 말했다. 남현희는 2011년 5살 연하 사이클 국가대표 공효석과 결혼했고 2013년 딸을 낳았다. 이후에도 선수 생활을 이어오다가 지난해 말 공식 은퇴했다.

-26년 동안 많은 메달을 따냈다.

“국제대회에서 총 99개 메달을 따냈다. 올림픽도 네 번 출전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은메달을 따냈고 2012년 런던대회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6년 쌍꺼풀 수술 논란으로 선수 자격이 2년 정지됐는데 그게 6개월로 축소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아시안게임에서는 2002년 부산대회부터 금메달 6개와 동메달 2개를 따냈다. 유니버시아드, 세계선수권, 아시아선수권 등에서 모두 우승해봤고 세계랭킹 1위에도 올라봤다.”

-적잖은 나이에도 계속 국가대표로 뛰었다.

“2013년 딸을 출산한 뒤 그만하고 싶었다. 올림픽 메달을 땄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으니 요리를 배우면서 남편 뒷바라지, 육아를 하고 싶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빨리 결혼해서 현모양처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큰 대회가 끝날 때마다 지도자들은 올림픽 출전권 획득, 후배 양성 등을 위해 선수 생활을 더 해달라고 요청했다. 고민 끝에 수락했고 이왕 하기로 한 만큼 최선을 다해 목표를 이루고 싶었다.”

-출산한 30대 엄마로서 선수를 계속하는 게 어려웠을 텐데.

“나는 일단 약속하면 투덜거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출산으로 인해 골반도 늘어나고 평소 안 좋은 오른쪽 무릎 연골이 거의 다 닳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훈련을 다 했다. 또 딸에게는 자랑스러운 엄마도 되고 싶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결승전에 가족을 처음으로 초청했다. 금메달을 딴 뒤 딸과 함께 있는 게 너무 기뻤다.”

-아시안게임 직후 무릎 부상으로 은퇴를 고민했는데.

“무릎에 물이 차 8주 동안 훈련을 못 했다. 대회에 나섰지만 성적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 동료가 임신하면서 선수 생활을 더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부터 회식에 불참하면서 몸 관리 하나에 모든 걸 집중했다. 국가대표가 된다는 책임감은 나에게 너무 각별하다. 어려울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일단 이기고 봐야한다.”

-2019년 말 진짜 은퇴를 발표한 이유는.

“사실 2020년 도쿄올림픽 출전을 준비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하려면 선거 직전 올림픽에 출전하는 게 필수다. 그런데 대회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단체전에라도 기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꾸준히 운동했지만 기회는 없었다.”

-은퇴 후 6개월 만에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나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훈련에서부터 재활까지 많은 부분을 스스로 해결했다. 올림픽 등 큰 대회에서는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 코치와 함께 싸우는 상대 선수와 마치 2대1로 싸우는 느낌도 늘었다. 엉치뼈, 무릎 등 많은 곳이 아팠고 그걸 재활훈련법을 만들어 스스로 극복했다. 이렇게 고생한 제2의 남현희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회원은 몇명인가.

“엘리트 선수를 포함해 14명이다. 일단 전문 선수 지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들이 성장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그림을 상상한다. 그런데 주위에서 생활체육 보급과 펜싱 저변확대를 위해 도움을 주려는 분들이 계속 생기면서 할 일이 더 많다는 걸 느끼고 있다. 나는 펜싱으로부터 많은 걸 얻었다. 펜싱이 잘 되도록 기여하고 싶다.”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그렇게 못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일이 잘 안 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집으로 가보니 가구 등에 압류 딱지가 붙어 있었다. 새로 산 냉장고가 우리 게 아니라는 거, 그게 구입가 대비 10% 가격을 넘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그때 가난에 대한 공포감을 강하게 느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정 빚을 갚은 걸로 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니까 상금 450만원이 들어왔다. 2004년 실업으로 가면서 계약금도 받았다. 이런 돈을 모아서 빚을 갚았다. 부모님은 받지 않으시겠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3녀 중 장녀로서 책임감이 컸던 것 같다.”

-체육발전유공자에게 주어지는 서훈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

“최고 훈장은 청룡장이다. 각종 대회 성적에 따른 점수를 합한 게 1500점이 넘으면 대상이 된다. 나는 3800점이다. 그런데 올림픽 금메달이 없어서 청룡장을 받지 못한다. 일단 청룡장 아래 맹호장은 받을 수 있어 그걸 검토하고 있다. 지도자로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길러내도 청룡장 대상자가 된다. 지도자로서 새로운 목표가 생긴 셈이다.”

-신체적 불리함, 편견 등에 맞서 선수 생활을 성공적으로 했다.

“키가 너무 작아서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내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1% 가능성만 있다면 해야 한다고 되뇌었고 그걸 이뤄냈다. 확률이 낮다는 건 앞서 그걸 해낸 사람이 적다는 뜻일 뿐 그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다. 1% 가능성이 있다면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자신을 지탱한 힘은.

“가족이다. 가족들은 항상 나를 응원했다. 또 하나 힘은 발렌티나 베잘리(이탈리아)다. 베이징올림픽 결승전에서 나를 1포인트차로 꺾은 선수다. 베잘리는 1등한 뒤에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기본에 아주 충실하게 다시 훈련했다. 마치 펜싱을 처음 하는 것처럼 진지했다. 실전에 앞서 몸을 정확하게 풀었고 훈련도 열심히 했다. 그 선수를 이기고 싶어서 영상을 직접 찍었고 수차례 돌려보면서 그대로 따라했다. 베잘리는 정말 세계 최고 선수다. 내가 올림픽 금메달을 못 땄고 세계랭킹 1위로 시즌을 마무리한 것도 없지만 나는 매순간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다.”

-철학적 측면에서 펜싱을 어떻게 정의하나.

“일상생활에 대한 모든 게 담겨 있다고 할까. 뭔가 부딪칠 때 이겨내야 하고 이겨내면 또 다른 장벽이 생긴다. 아주 복잡한 상황 속에서 전술적으로, 기술적으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을 찾아내 실행에 옮겨야 한다. 내가 기회를 잃으면 그게 바로 위기가 된다. 아주 짧은 순간에 모 아니면 도식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할까. 내가 다치는 게 무서워 상대를 꺾어야 하는 진짜 싸움 같다.”

■남현희는 누구

남현희(39)는 금광초등학교, 성남여자중학교, 성남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펜싱은 중학교 때 시작했다. 한국체육대학교를 거쳐 올해 초 경기대학교에서 스포츠과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은퇴할 때까지 선수생활을 26년이나 했다. 국제대회 메달은 99개다. 올림픽은 네 번 출전했고 은메달 1개(2008년 베이징), 동메달 1개(2012년 런던)를 따냈다. 한국 여자 펜싱 선수 최초 올림픽 메달리스트다.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등에서는 자주 우승했지만 올림픽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6개로 박태환(수영), 유서연(볼링)과 최다 타이다. 키 154.7㎝, 체중 45㎏이다. 발크기는 213㎜다. 주종목은 몸통 공격만 허용되는 플뢰레다. 작은 체구가 수비에서는 도움이 됐다. 여자 플뢰레 세계랭킹 1위에 올라봤지만 시즌을 1위로 마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