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덕수고 야구부 정윤진 감독과 인터뷰 중 나온 에피소드 하나. 2003년, 키움 이용규(37)가 덕수고 3학년 때 일이다.

그해 어느날, 당시 야구부 코치이던 정 감독은 다음날 경기에 대비해 선수들을 일찍 귀가시켰다. “딴 데 가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가 푹 쉬면서 컨디션 관리를 잘 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정 감독이 학교 앞 은행을 찾으면서 일이 터졌다. 지도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촉’이었다. 은행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중에 좋지 않은 ‘느낌’이 밀려왔다. 시선은 곧장 같은 건물 지하 1층의 ○○당구장으로 향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당구장 문을 활짝 열었다.

일부 선수들과 정 감독의 눈이 마주치며 정지 화면 같아진 찰나의 순간. 정 감독이 따로 얘기를 하지 않아도 선수들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 감독은 다음날 경기까지는 그에 관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경기에서도 무난히 승리했다.

그제서야 자연스럽게 진행된 훈시의 시간, 정 감독은 그날 유일하게 현장에 없었던 주장 이용규를 거론하며 “주장을 봐라. 얼마나 말을 잘 듣나. 자기 관리를 잘 하니 야구도 잘 되는 것이다. 주장을 보고 배워라”고 강조했다.

그날의 진실이 드러난 건 이용규가 2004년 프로 입단 뒤 한두 시즌이 지난 때였다. 이용규는 은사인 정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일종의 ‘고해성사’를 했다. “그날 기억하시죠. 사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요….”

당구장은 정문과 후문, 양쪽 통로를 사용하고 있었다. 손님 대부분은 정문을 이용한다. 그날 이용규는 정문 앞 당구대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고, 수시로 입구로 통하는 계단을 살폈다. 그러던 중에 계단을 내려오던 정 감독의 신발이 이용규의 시야에 걸려든 것이었다. 이용규는 도루하듯 빠르게 스타트를 끊었다. 반대쪽 후문을 통과하며 홀로 ‘홈스틸’에 성공했다.

덕수고에서 코치·감독으로 28년을 보낸 정 감독이 그날의 일화를 소개한 것은 기억에 남는 제자 중 이용규가 앞서 떠오르는 선수이기 때문이었다. 이용규는 그날의 발빠른 움직임처럼 ‘날쌘돌이’로 프로야구 무대로 뛰어다녔다. 30대 중반의 나이를 지나면서도 지난해까지 16년 연속 두자릿 수 도루를 하는 기동력과 센스를 발휘하고 있다.

지금 이용규는 모교의 ‘산타클로스’가 돼있다. 덕수고 야구부가 배출한 여러 스타플레이어 중 모교와 후배 사랑이 으뜸이다. 이용규는 FA 계약을 하고 한화에서 뛰던 시절, 덕수고에 5000만원을 기부했다. 또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덕수고의 위례신도시 이전이 화두로 오른 2018년 12월에는 후배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해 거리 시위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전 부지는 야구장을 짓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정 감독은 그날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제자의 모교 사랑에 고마움을 나타냈다.

덕수고는 올해 부분 이전을 시작한다. 야구부는 2024년 이동할 예정인데, 학교 인근 성남에 마련한 별도 부지에서 운동을 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