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육군 현역의 복무기간은 대략 18개월, 1년 6개월이다. MBC 드라마 ‘연인’의 배우들이 처음 캐스팅되기 시작한 시점이 지난해 초여름, 6월초 정도다. 최종적인 촬영을 지난 16일 마쳤으니 이들 역시 1년 6개월의 시간을 한 작품에 바쳤다.

그냥 시간만 군 복무 시간만큼을 보낸 것이 아니다. ‘연인’은 로맨스 사극치고는 철저하게 야외촬영에 몰두했던 작품이었다. 능군리의 절경과 병자호란의 전장, 중국 심양의 척박한 포로시장과 돌아온 조선의 궁 등 모든 촬영이 외부에 이뤄졌다. 다른 드라마가 예비군 훈련 수준의 난도라면, ‘연인’은 특수부대의 훈련장을 방불케 했다.

“추울 때부터 추울 때까지 촬영했어요. 촬영도 그냥 촬영이 아니었고, 매번 뛰거나 묶이거나 끌려가거나 넘어지는 촬영이었죠. 남궁민 선배님과 저뿐 아니라 스태프분들도 일주일에 한 번 링거를 맞아야 하는 일정이었어요. 끝나고 나니 ‘아니 내가 연인도 찍었는데’하면서 자신감이 절로 생기더라니까요.”

자신의 고생을 자랑스레 무용담으로 말할 수 있는 배우. 바로 유길채 역 배우 안은진의 이야기다. 안은진은 이 작품에서 능군리의 말괄량이 규수 유길채에서 병자호란을 겪고 삶을 스치는 깊숙한 상처를 지나 이장현(남궁민)을 만나 비로소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한 여인의 일대기를 그려냈다. 초반 안은진의 인지도, 이미지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끝난 지금 그런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누가 봐도 하고 싶은 배역이에요. 연기 인생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닌 거죠. ‘이걸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지난해 연말부터 감독님께 SOS를 쳐서 대본연습도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작가님과 회의하면서 캐릭터를 잡아갔어요. 현장에서도 남궁민 선배님이 도움을 주셨고요. 초반의 길채가 잡히자 그저 작품을 따라 저절로 몰입돼갔습니다.”

병자호란을 거치는 모진 시련 속에 피어나는 사랑을 그렸던 만큼 많은 로맨스 장면이 인상에 남았다. 안은진은 대본 속 두 대사를 따로 적어놓고 힘들 때마다 꺼내 봤다. 하나는 몸종 종종이(박정연)에게 하는 “강화도에서도 우리는 살았어. 살아서 좋았어”였다. 길채의 행동 밑바탕에 있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하나는 이장현이 해주는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다. 모진 촬영환경을 이겨낸 스스로에게도 해주고 싶은 대사였다.

“남궁민 선배님뿐 아니라, ‘장구량(장현+구잠+량음)’ 멤버들 그리고 ‘길은방종(길채+은애+방두네+종종이)’ 멤버들과도 전우애가 생겼어요. 남궁민 선배님은 굉장히 똑똑하고 디테일이 살아있는 분이세요. 어떻게 찍으면 어떻게 나오는지 아시는 분이었고. 제가 연기적으로 흔들릴 때마다 명확한 답을 주시는 분이었죠. 그렇게 완벽을 기하시니까 늘 완성도 있는 작품이 나온다는 사실을 느꼈어요.”

안은진이 늘 하는 이야기지만 그는 늘 “나라면 못 했을 일을 하는 캐릭터를 맡았다”고 이야기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추민하나 ‘한사람만’의 표인숙, ‘나쁜엄마’의 이미주 등이 그랬다. 하지만 유길채는 이들 모두의 시련과 번민과 사랑을 모두 품은 듯한 인물이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연기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성장한 안은진의 모습은 부정할 수 없다. 길채의 뜨거운 생명력은 안은진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늘 저보다 건강하고, 단단한 캐릭터를 많이 했어요. 역사 안의 사람이고, 더욱 운명의 소용돌이에 있지만, 주체적인 선택을 하잖아요. 결국 느낀 것은 ‘그 상황이 오면 길채의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되는구나’였어요. 늘 작품을 하면서 고민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 나를 내던져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길채 덕분에 힘들 때도 용기를 내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고초를 겪는 길채의 상황에 따라 외모도 말라갔다. 또한 청에서 조선으로 속환된 후 ‘환황녀’라는 시련도 닥쳐왔다. 말라보이기보다는 ‘버석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실제 오랜 촬영을 마친 안은진의 모습은 훨씬 수척해 보였다. 하지만 그 형형한 눈빛은 확실하게 달라졌다. 비록 작품 후에 외부에서는 ‘동급최강’의 수식어가 붙었지만 실감하지 못한다. 오직 스스로를 다지는 시간이었음을 깨달을 뿐이다.

“저에 대한 인기를 체감 못 하고 있었어요. 많은 수식어를 보면 감사하면서도 과분하다고 생각돼요. 모든 게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연인도 했으니, 앞으로 뭘 못 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언제 때칠을 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청나라 옷을 입고, 결혼도 이혼도 할 수 있었겠어요. 이런 경험뿐 아니라 동료, 스태프들과 함께한 1년의 기억에 제게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안은진에게 오롯이 ‘연인’에 쏟아부었던 1년 6개월은, 모든 것을 쏟아내는 과정이었지만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채워내는 시간이었다. 지금까지의 안은진을 생각하지 말자. 그는 분명히 달라졌다. 더욱 단단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안은진 2.0’의 버전으로 앞으로의 길을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