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봄을 맞아 도보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도보여행을 즐기는 이유는 제 각각이다. 제주올레 길을 1만킬로 이상 걸은 도보 여행 달인들은 왜 그 길을 걷고 또 걸을까.

(사)제주올레는 제주올레 27개 코스, 총 437㎞를 20회 이상 걸은 사람들, 일명 걷기의 달인들의 ‘1만 킬로미터 모임’을 최근에 결성했다. 걷기의 달인들은 제주올레 6코스를 서명숙 이사장과 함께 걷고 ‘대한민국 국민들을 걷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주제로 간담회를 가졌다고 21일 전했다.

제주올레는 2012년 9월부터 공식 완주자를 집계해 왔으며, 제주올레 길을 1만㎞ 걸으려면 437km를 23회 완주해야 한다. 그중 23회 이상, 1만㎞를 넘게 걸은 이가 20명, 이날 참석한 이는 9명이었다. 이 중에는 77회 최다 완주자로 3만 3000㎞ 이상을 걸은 이, 45회를 걸어 2만㎞ 가까이 걸은 여행자도 있었다.

“걷기는 세상의 번뇌, 나태, 두려움 등을 기반으로 한 고통스러운 정신적 습관에서 벗어나 사랑과 평화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제주올레 길을 51회 완주한 최기선씨(77세)가 1만㎞ 모임 끝에 남긴 말이다. 최씨는 서른셋 나이에 세살 아들을 급성백혈병으로 잃고 신앙에 의지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에게 10년마다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43세에 유방암 선고를 받았고, 53세에 자궁 근종이 많아 자궁을 들어내야만 했다. 그럴수록 봉사하는 삶에 매달리면서 평안과 위로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또 한 번 시련이 최씨 나이 63세에 대장암 2기 선고로 찾아왔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남을 위한 봉사 대신 자신을 위해 쓰고 싶어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울 근교 산으로 무작정 달려갔고, 제주에는 천주교 순례길을 걸으러 내려왔다. 그때 우연히 보게 된 푸른색과 오렌지색 리본. 제주올레 길의 표식이 눈에 띄었다. 시간이 될 때마다 제주올레 길을 걸은 최씨는 2017년 가족들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제주에 내려가 딱 5년만 살다가 돌아올 테니 장기 휴가를 달라고. 암에다 고지혈증과 당뇨 수치까지 높은 부인과 엄마를 혼자 내려 보낼 수 없어 가족들은 만류했지만 그는 용기 있게 제주행을 감행했다. 매일 제주올레 길을 걸었더니 1년 반 만에 담당 의사도 놀랄만큼 건강해졌다. 암은 물론 당뇨와 고지혈 수치가 좋지 않아 회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담당 의사조차 “뭘 해서 이렇게 좋아졌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최씨 답은 “걷기”였다. 이후 그는 제주에만 머물지 않고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800㎞에 이르는 해파랑길을 세 번에 걸쳐 완주했고, 2019년에는 60일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도 완주했다.

“코로나 때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힘들 정도로 우울감과 무력감이 심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을 따라 올레길을 걷게 됐는데 신기하게도 한 걸음씩, 한 코스씩 걷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죠” 1만 킬로미터 모임의 유일한 20대, 최연소 박조은씨(27세)는 26회 완주를 했다. 코로나 시국에 제주에 내려와 올레길을 걸으면서 클린올레와 나꽁치(나부터 꽁초를 치우자)라는 환경 캠페인을 하다 보니 무력한 시간과 이별을 하면서 새로운 성취감과 새로운 꿈을 얻게 되었다. 이제 무력함에 빠진 청년들이 길 위에서 얻는 희망과 생명의 힘을 얻기를 바라면서 친구들에게 제주올레 패스포트를 사주며 같이 걷자고 권하고 있다.

“제주올레 길에서 새로운 경력을 쌓고 있어요” 제주올레 길을 45회 완주한 김용찬씨(67세)는 7년 전 36년 동안 다닌 회사를 은퇴하고 제주로 내려와 지금은 올레지기와 길동무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에 산다면 올레길을 한 번 걸어봐야지, 하고 시작했던 올레길은 김씨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 주었다. “15번째 완주를 했을 때쯤 길동무라는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길동무는 올레꾼들에게 제주의 문화와 자연을 알기 쉽게 해설해 주는 프로그램인데요. 교육 전에 걸은 올레길은 발로만 걸은 셈이고 교육 후에 걸은 올레길은 매번 걸을 때마다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는 경험을 주고 있어요” 은퇴 후 직업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김씨지만 길을 걸으면서 얻게 된 경험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며 올레길을 걷는 이들에게 “한 번 걷고, 두 번 걷고 계속해서 걸어보세요”라고 권하고 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인생에서 만나보지 못한 희열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길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된다. 나와 비슷한 아픔을 안고 희망을 얻기 위해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사람들을,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자연의 위대한 힘을, 그렇게 자연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무너졌던 마음 안에 희망의 불씨가 생겨나고 다시 한번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최근 (사)제주올레에서 발표한 ‘제주올레 길 완주의 건강 효과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올레길 완주 후 정신적 건강이 좋아졌다고 응답한 이는 97.2%로 거의 모든 완주자가 정신적 개선 효과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신체적 건강이 좋아졌다고 응답한 이는 87.2%, 사회적 건강(사회적으로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하고 인간관계가 좋은 상태)이 좋아졌다고 응답한 이는 88.1%로 1만㎞ 이상 걸은 이들의 이야기가 실제 사례로 입증된 셈이다.

1만㎞ 모임의 윤혜경씨는 “올레길은 삶의 끝에서 저를 다시 살게 해준 길입니다”라고 소감을 말하며 지금은 일상에서 지칠 때마다 올레길을 걸으며 안정과 활력을 얻고 있다고 말했으며, 황지영 씨는 “걸으면서 비울 수 있고 비워진 자리에 새로운 생각들이 채워져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한 발짝 내디딘다는 것은 곧 새로운 출발이라 생각하며 일단 걸어보세요”라며 걷기를 예찬했다. 28회 완주자 김옥순 씨는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것이라 믿으며 지난번 걸었던 길에 두고 온 기억으로 오늘 걷는 이 길이 더욱 새롭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 제주올레 길 위의 리더십 과정에서 강연자로 참석한 서강대 최진석 명예교수는 “걷기는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걷기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리듬을 회복하는 지적 활동이며 이 근본적인 리듬은 그 사람을 자신으로 만들어낸다”라고 말했다. 길을 걷는 건 자신에 대한 감각을 살리는 일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라는 것. 그렇기에 같은 길을 걷고 또 걸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1만㎞ 모임에 참여한 걷기의 달인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