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력이 문제다.”

성적이 좋지 않은 팀을 지적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다. 오랜 시간 프로야구 4강에 못간 LG와 롯데가 그랬고, ‘명문’에서 꼴찌로 추락했던 2000년대 중반 KIA도 그랬다.

그 ‘정신력’ 면에서 단연 역대최강으로 꼽히는 팀이 해태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 아래서 후배들이 벌벌 떨었다던 해태의 선후배 질서는 야구 환경과 문화가 크게 바뀐 지금은 ‘전설’처럼 전해질 뿐이다.

해태가 KIA로 바뀌었듯, 많은 것이 변했다. 슈퍼스타들로 가득했던 선수단도 변했고, 인상만 쓰면 모든게 다 됐던 무서운 ‘악질 선배’도 지금 KIA에는 없다.

그런 KIA에 ‘해태’가 돌아왔다. 선동열 감독을 비롯해 해태 스타 출신 코칭스태프가 KIA를 이끌면서 ‘타이거즈 정신’이 다시 화두가 되고 있다.

선 감독도 올해 지휘봉을 잡으면서 “타이거즈 정신을 뿌리내리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현재 KIA 선수단에서 ‘무서운 해태’를 직접 겪은 선수는 최고참 이종범이 사실상 유일하다. 신세대들로 가득한 요즘 KIA에 타이거즈 정신은 어떤 식으로 뿌리 내릴 수 있을까.

KIA 최고참 이종범(42)과 그 다음 세대를 책임지고 있는 서재응(35)을 만나 ‘타이거즈 정신의 변화’에 대해 들어봤다.

막내였던 이종범이 돌이키는 옛날 해태 이야기와 달라진 팀의 ‘군기반장’ 서재응의 KIA 이야기.

미국 애리조나에서 전지훈련을 치르고 있는 두 고참은 “타이거즈 정신이란 단순히 엄한 위계질서가 아니라 개개인이 갖는 자존심과 프로의식”이라고 입을 모았다.

-새 코칭스태프와 함께 하는 캠프, 어떤가요.

이종범=지금 감독·코치님들과 같이 선수로 뛰었던 나로서는 요즘 ‘이 사람들이 전의 그 사람들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때는 참 무서운 선배들이었는데, 세월이 많이 흐르긴 한 것 같아요. 내가 ‘저 분한테 어떻게 맞았다’고 말하면 애들이 믿지도 않아요. 나는 그 때 ‘프로도 못하면 맞는구나’ 하고 엄청 충격받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치니까 좀 그렇고(웃음). 아무튼 사고방식도 많이 바뀐 것 같고, 어린 선수들과 대화로 풀어가려는 모습이 보이죠.

-서재응 선수는 해태를 경험하지 않았는데.

서재응=미국에 있는 동안은 해태를 몰랐지만, 저도 광주일고 출신이잖아요. 해태 출신 코칭스태프 중에 광주일고 선배님들이 많아요. 군기가 강한 학교거든요. 선·후배간 예의를 중요시한다는 점도 그렇고, 어릴 때부터 보고 들었기 때문에 피부로는 못 느껴도 해태가 어떤 곳이라는 개념은 마음 속에 갖고 있었죠.

-KIA가 해태로 돌아간다고들 하는데.

종범=해태는 강압적이고 무거운 분위기였어요. 시키는대로 해야 하고, 선·후배 관계도 그랬고. 하지만 지금 우리 팀은 그렇지 않잖아요. 선 감독님도 코치님들도 애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하시는데, 그 것부터가 다르죠. 후배들에게 그렇게 강하게 하는 선배도 없어요.

-그럼 뭐가 해태로 돌아간다는 건지.

종범=프로의식이겠죠. 후배 엄하게 대하고 위계질서 강한 게 해태 정신의 중심이 아니에요. 프로로서 알아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짜 해태정신이지. 당시 선배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프로의식이 강한 사람들이었어요. 자존심도 엄청나게 셌고 각자 개성이 다 뚜렷했지. 해태 정신은 그래서 지금 더 필요한 거 같은데. 각자 그런 프로의식과 자존심을 갖고 야구하자는 거죠. 요즘 선수들도 개성이 강해요. 차이가 있다면 그때 선배들은 야구 잘 하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어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훈련해도 만족 못했지. 하지만 요즘 후배들은 훈련량에만 만족한다고 할까. ‘아, 이만큼 했으니까 됐다’ 이런 식이죠. 프로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당시에는 단체운동 거의 안 하고 개인 운동 위주로 했거든요. 그게 팀을 더 강하게 만든 조건인 것 같아요.

재응=그 때는 선배들이 다 쟁쟁한 분들이었고 그게 해태라는 팀의 특수한 상황이었잖아요. 어떻게 보면 다시 나오기 힘든 팀이죠.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고 팀 구성도 다르기 때문에 그 때 같은 분위기로 끌어가기 힘든 것 같아요. 저도 온 지 5년 됐는데 선배님이 크게 집합시킨 적은 10번도 안 돼요. 연패 중일 때나 어린 후배들이 너무 기고만장 할 때 정도죠.

-해태에서 막내로 사는 건 어땠나요.

종범=잘 하려고 야구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선배들한테 욕 안 얻어먹을까 생각하며 야구했지. 개인적으로 혼난 적은 거의 없는데, 경기장에서 웃었거나, 청소를 안 했거나, 인사를 잘못했거나 해서 단체로 기합받은 적이 많아요. 지금으로 치면 사소한 일들인데, 그 때 선배들이 했던 방식으로 지금 내가 한다면 아마 매일 인터넷에 이름 나올걸. 따르는 후배도 한 명도 없겠지. 선배들 때문에 지금의 나도 후배들 가르치는 게 많이 변했죠.

-지금은 후배들도 많이 다르죠

재응=자기 주장이 강하죠. 선배가 ‘해’ 하면 ‘예’ 했는데, 지금은 ‘왜요?’부터 나오니까. ‘열심히 해라’ 하면 ‘어디가 올라올 것 같습니다’ 라고 하고. 아프기 전에 미리 아플 걸 걱정하는 거죠.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자기관리 잘 해서 부상 없으니 팀으로서는 좋은 면이라고 볼 수 있어요.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지. 선배들이 잘 융화시키기만 하면 좋은 팀이 되는 거죠.

종범=하지만 선·후배 간 위계질서는 필요해. 과거 해태는 선배들 위력이 막강했어요. 야구를 워낙 잘 했지만, 훈련도 각자 경쟁하듯 열심히 했거든. 어린 후배 중에 스타가 나오기 쉽지 않은 팀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후배들 가운데 스타가 많잖아요. 어린 선수가 스타가 돼도 선·후배 구분이 잘 돼야 팀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지. 재응이 니가 못 던진다고 후배들이 짜증내봐. 그게 무너지면 팀이 안 되죠.

-그런 점에서 고참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종범=그래서 캠프에서도 하루 종일 일과를 후배들과 똑같이 소화하려고 하잖아요. 후배들과 똑같은 스케줄을 빠짐없이 해낸 것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어요. 캠프 목표가 끝까지 후배들과 같이 하는 거에요. 분위기는 재응이가 잡지.

재응=나도 응원단장이라고들 하지만, 그건 고참이라서 듣는 말인 것 같고, 선배님과 마찬가지에요. 이번에 러닝훈련이 굉장히 센데, 안 처지려고 오기로 더 끝까지 뛸 때가 많거든요. 후배들이 ‘고참이라고 슬슬 한다’고 생각할까봐 처지기가 싫어요. 선배가 되면서 느낀 게, ‘내가 이렇게 하면 애들도 나태해지겠구나’란 생각이 들어서 훈련할 때는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종범=재응이는 정말 열심히 해요. 이 정도 뛰면 아플 때도 됐는데 싶어서 ‘괜찮냐’고 내가 물을 정도니까. 이제는 권위의식 갖고 할 수 없는 때라 고참이 더 힘들죠.

-아직도 밖에는 KIA가 무서운 팀으로 소문나 있던데.

재응=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온 박준수가 놀라더라고요. 분위기 엄청 세다고 들었는데 와보니 그 정도는 아니라고. 나는 그게 좋다고 생각해요. 트레이드 돼 오더라도 일단 긴장하고 오거든요. ‘잘 해야겠구나’ 처음부터 생각하고 오니까 바르게 행동하고, 그러다 생활하면서 편해지는 거죠. 밖에서 봤을 때 ‘저 팀 콩가루다’ 하는 것보다는 어려워 하는 게 낫다고 봐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서재응 후배가 마음에 안 들 때도 있나요.

종범=있었죠. 처음 왔을 때는 경기할 때 감정이 격해져서 욕을 하고 난리더라고. 무슨 용병처럼. (김)상훈이한테 ‘니 친구 좀 말려봐라’ 했지 매번. 지금은 많이 참더라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