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성민(44)은 목격자 진술만으로 몽타주를 그리기 힘든 얼굴이다. 각진 얼굴형, 눈사람처럼 짙은 눈썹 등 신체상의 특징도 별로 없고 엄청난 아우라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동네 호프집에서 치킨 안주에 맥주를 마시는 아저씨, 사무실에서 회의 중 꾸벅꾸벅 조는 만년 과장, 대형마트에서 아내와 함께 장을 보는 남편 등 우리 일상의 어느 풍경에선가 본 듯한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의 모습이다.

이성민의 이력서를 보면 은근히 많은 연극,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 최근에 선보인 드라마만 해도 MBC <더킹 투하츠>에선 선하고 모범적인 대한민국 제3대 왕 이재강, <마이 프린세스>에선 한국 최연소 대통령으로 정의롭고 냉철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내 마음이 들리니>에서는 부인에게 꼼짝 못하는 치킨집 사장 역할을 연기했다. <파스타>에서는 이선균이 일하는 레스토랑 ‘라 스페라’의 월급사장이면서도 주인인 척 권력을 휘두르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설준석으로 등장해 웃음을 주었다.

그런데 많은 시청자들은 그가 출연한 장면을 보면서 “어, 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누구지?”란 반응을 보인다. 너무 다양한 변신을 해서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성민은 배역에 따라 2대8 가르마, 짧은 앞머리 등 헤어스타일과 의상까지 완벽하게 변신해왔다. 이번 MBC 월화드라마 <골든타임>(극본 최희라·연출 권석장 이윤정)을 위해선 7㎏이나 감량했다. 그런 깨알 같은 노력이 이제 감동과 환호로 이어지고 있다.

<골든타임>은 의학드라마다. 긴박감 넘치는 병원, 생과 사과 넘나드는 수술실, 갖가지 사연을 가진 환자들이 등장하는 의학드라마는 시청률 불패의 장르다. 다른 의학드라마처럼 카리스마가 넘치거나 천재 같은 의사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눈물겨운 삼각관계가 펼쳐지는 것도 아닌 <골든타임>은 처음엔 한 자릿수의 저조한 시청률을 보였다. 하지만 지방 병원, 그것도 나이들고 좀 궁상맞아 보이는 최인혁이란 의사 역을 맡은 이성민,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던 그의 맹활약으로 현재 월화드라마 중 1위다. 시청자들은 그가 보여주는 최인혁을 통해 요즘 너무나 희귀해진(?) 진짜 의사, 진정한 의술과 인술에 대리만족을 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다. 그는 병원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사직서를 내고 은둔중이었다. 그를 걱정하는 절친 마취과장을 만나 내기당구를 치고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잠시 후 “쾅” 하는 소리가 들려 달려가보니 바로 자신에게 짜장면을 배달해준 배달부가 교통사고를 당해 쓰러져있다. 그는 일단 재빨리 응급처치를 하고 이어 달려온 119에게 환자의 상태를 이야기해주었고 구급차를 같이 타고 병원을 찾아가지만 부산 어느 병원에서도 환자를 받아주려하지 않는다. 어쩔 수없이 쫓겨난 세중병원에 직접 전화를 걸고 수술준비를 부탁한다.

돈이 안된다고 응급실을 없애려는 병원, 가난한 환자에게는 유난히 박정한 병원에서 실력파 이성민과 그를 따르는 제자와 의료진 덕분에 환자의 생명을 구해낸다. 한번이라도 한밤중에 가족이 아파 온동네 병원을 정신 없이 다니고,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짐짝 취급을 당해본 이들이라면 이성민이 분한 최인혁 같은 진짜 의사가 얼마나 그립고 고마울까.

그는 또 지역구 국회의원이 병원을 방문해 거의 식물인간이 된 환자와 기념 사진을 찍는데 ‘조연’으로 등장한다. 병원장과 간부의사들은 그 국회의원이 혹시라도 병원발전과 운영에 도움이 될까 그를 환대한다. 명의로 소문난 그에게 사진 촬영을 요구하는 그 천박한 국회의원의 몰지각한 행동에 구역질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병원에 도움이 되기 위해 그는 기꺼이 민망함과 난감함이 교차되는 표정으로 사진촬영에 협조한다. 개인의 감정보다 병원과 환자를 위하려는 그의 속내가 읽혀지는 장면이다.

물론 그의 연기는 20년간 내공이 쌓인 덕분이다. 1990년대 초반 연극에서 출발해 연극과 드라마, 영화를 오간 그는 20년째 조연이었다. 2004년부터 40편이 넘는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지만 감초연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골든타임>으로 마침내 주연 반열에 올라섰다. “처음에 ‘내가 이걸 어떻게 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주류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주류 배우는 아니지 않나. 그래서 해볼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나는 존재, 주류가 아니어서 선택한 <골든 타임>은 7월 9일 첫 방송을 탄 후 한 달도 안 돼 수술 장면 연기에서부터 다른 의사들과 갈등과 대립을 하는 장면 연기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연기력을 보이며 ‘최인혁 앓이’ ‘성민앓이’ 등 광팬들을 만들었다. 오히려 이선균이 돋보이지 않아 “과거 드라마 <파스타>에서 주인공과 조연의 관계가 역전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성민은 의사로서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지만 정작 사랑과 연애에 서툴러 더 사랑받는다. 그의 짝사랑 연기도 시청자들에게 화제가 됐다. <골든타임> 속 최인혁과 간호사 신은아(손선미)의 술자리 신은 이성민이 원래 대본과 다른 장면과 대사를 넣어 더 큰 울림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대본 속 최인혁 대사는 “가기 전에 약혼자랑 밥 한 번 같이 먹자니까…. 언제 한 번 시간 잡아봐요”라는 부드러운 톤이었다. 반면 방송에서는 술에 잔뜩 취해 거칠게 “그러면 가기 전에 밥 한 번 먹읍시다! 남자친구하고!”라는 대사로 변모했다. 이성민의 역할과 대본 분석 덕분이다.

“상황상 최인혁은 아련하기보다는 거나하게 취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한 맺힌 걸 털어놔야 하고, 신은아에게 용기 있게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는 술을 더 마시는 것이 최인혁의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술에 취해 있으니 화를 확 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 것이다. 대본을 보며 그 부분에서는 소리를 질러도 될 것이라 생각했고 제작진도 동조해줬다. 배우 입장에서 그렇게 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시청자들은 각종 게시판에 “좋아하는 여자를 곧 떠나보내야 하는 남자의 다급한 마음이 느껴졌다” “좋아하는거 티 안내려는 사람들은 꼭 저렇게 버럭하더라” “술 한 잔도 못 마신다는 분이 연기 정말 리얼하다” 등의 공감을 보였다.

멋진 외모와 젊음을 무기로 청년기에 주인공을 도맡다가 중년이 되면서 존재감이 없어지는 연기자들에 비해 20년 동안 온갖 조연을 다 소화해낸 후에 40대 중반에 주연의 반열에 오른 이성민의 성공은 더욱 값지다. 이제 시청자들은 그의 다음 작품에서 절대 “저 사람, 많이 본 것 같은데 누구더라”란 말을 하지 않을 게다. 이성민은 충분히 그의 매력을 각인시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