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민의 소도마을 신농일기] 결핍이 뺏어가는 당신의 마음

한국화가

입력 : 2019.10.09 16:30

일월몽유도, 150×75㎝, 한지에 구채옻칠, 2019(Korea Painting on Han-ji), 2019

다섯 살 때 전기도 전화도 없는 외딴 섬마을에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사전에 그 어떤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보내졌는데, 엄마는 다소 엄한 얼굴로 ‘말 잘 들으면 데리러 온다’라고 말씀하시고는 혼자 떠나셨다.

말을 잘 들어야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까 어린 마음에 매사에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심지어 그 정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은 2년이나 됐다. 물론 외할머니는 이 지구상의 모든 어른을 통틀어서 가장 많은 사랑을 주셨고 많이 쓰다듬어 주셨다. 하지만 ‘부모’라는 존재는 특히 아이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이다 보니 이후 성장하면서 늘 사랑에 대한 결핍을 느꼈던 것 같다.

결핍은 때로는 우리에게 강한 성취동기를 부여하고 무언가를 열심히 할 의욕을 심어주고 내 삶을 성장하게 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결핍은 사람들의 생각을 좁게 만들고 자기 조절 능력을 떨어뜨리며 타인과의 관계를 왜곡시킨다고 한다.

결핍된 것에 너무 많은 생각을 집중하는, 온통 거기에만 뇌 에너지를 쏟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결핍의 어두운 점’이라고 한다. 나는 20대 초반에 이성을 만나 사귀면서 나도 모르게 버려질까 봐 늘 전전긍긍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나답지 않게 고분고분하게 행동했다.

1960년대 후반 스탠퍼드대학교 부설 빙 유아원에서 처음 시행된 ‘마시멜로 테스트’가 있다. 실험실에서 4~5세 어린이들에게 눈앞의 마시멜로를 15분 동안 먹지 않고 참으면 15분이 지난 후 1개의 마시멜로를 더 주겠다고 제안하는 내용의 실험이다.

흔히 자제력이나 의지력, 즉 자기를 통제하는 문제와 관련지어 회자되는 이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잘 참고 2개의 마시멜로는 얻게 된 아이들이 나중에 알코올중독에 걸릴 확률도, 범죄를 저지를 확률로 현저히 낮았다고 한다. 50여 년을 이 실험에 매달려 온 실험의 창안자 월터 미셸 박사는 ‘사회적 성취를 얻는 데 있어서 충동을 억제하는 능력이 얼마나 주요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린 시절 결핍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충동을 억제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본능적인 부분의 결핍일수록 더 그러하다고 한다. 하지만 또한 결핍이 우리 삶에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가장 널리 알려진 연구가 ‘마감 효과’다. 마감이 다가오면 갑자기 효율이 늘어나고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한다. 칼럼을 마감하기 직전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어떤 때보다 글이 잘 나온다. 또 전시 날짜가 임박할수록 작업이 잘 돼 상상을 초월하는 작품의 양이 나오기도 한다.

2010년경 미술치료를 공부하면서 유년 시절의 애정 결핍과 엄마와 떨어져서 느끼는 불리불안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됐고, 그것을 대면하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 인생의 결핍과 당당하게 대면할 용기를 가진다면 결핍은 우리를 꼭 성장시킬 것이다.

■오늘의 그림은?

어느 날 꿈속에서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그곳은 어디선가 본 것 같았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그런 풍경이었다. 풍경 안의 녹아든 산과 구름·바위 같은 요소들이 마치 정물처럼 놓여 있었고, 대체 어디가 안이고 또 어디가 밖인지 경계가 없이 오래된 가구들이 곳곳에 놓이거나 공중에 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불안하기는커녕 위화감 없이 생생하게 안정돼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내 마음이 참 기뻤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서도 그곳에 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평소에도 그리워했다. 그래서인지 거짓말처럼 이후에도 여러 차례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 그 신비로운 풍경들은 마치 그림 같았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그림으로 표현하면서도 ‘그야말로 그림답다’라고 생각했다.

■전수민은?

전수민(田秀敏, Jeon Soo Min)은 어디선가 본 것 같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풍경을 그린다. 전통한지와 우리 재료를 이용해 우리 정서와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한국화가다.

한국은 물론 미국 워싱턴DC 한국문화원, 프랑스 아리랑갤러리, 이탈리아 베네치아 레지던스, 중국 LOTI X HUMMI 디자인 박물관의 초대전을 비롯한 17회의 개인전 그리고 일본 나가사키현 미술관, 뉴욕 등의 단체전 90여 회, 각종 아트페어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아직 듣지 못한 풍경>(2012), <일월산수도>(2013), <일월산수도-피어나다>(2014), <일월연화도>(2015)(2016), <일월부신도>(2017), 명감 <일월초충도>(2018), <일월모란도>(2018), <일월몸유도>(2019) 등이 있다.

현재 화천소도마을 대안학교 ‘신농학당’의 교장으로도 근무하고 있다. 또한 그림 수필집 <이토록 환해서 그리운>(2016)과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2017)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