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이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살려줬으면….”

개최국 호주의 아시안컵 결승행 축포가 쏘아올려진 27일. 쉼없이 노트에 메모하던 한 남자는 마치 자신이 경기에 뛰는 것처럼 발 끝에 힘이 들어갔다.

한국 축구가 마지막으로 아시안컵 결승에 올랐던 1988년 현역 멤버로 활약했던 박경훈 전 제주 감독(54)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SBS 해설위원으로 데뷔한 그는 호주 뉴캐슬 스타디움에서 ‘스포츠경향’과 만나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상대를 분석하고 있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박 전 감독은 이번 대회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후배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61)이 지휘봉을 잡은 지 4개월. 제대로 된 훈련은 1달여가 전부이건만 조별리그부터 준결승까지 무실점 승리로 결승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박 전 감독은 “후배들이 경기를 치를수록 발전하는 게 눈에 보인다”며 “부디 후배들은 우승컵을 들어올렸으면…”이라며 자신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그에게 아시안컵은 그저 잊고 싶은 과거다. ‘아시아의 삼손’으로 불렸던 김주성을 비롯해 황선홍과 최강희, 황보관, 이태호 등과 함께 결승에 올랐지만 우승 문턱을 넘지 못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결승에서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3-4로 눈물을 흘렸다. 당시 한국은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 참가한 뒤 같은 해 서울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하며 승승장구했기에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이후 한국 축구가 결승에 오르지 못하면서 허탈함은 더욱 진해졌다.

당시를 떠올린 그는 “공교롭게도 당시 날 상대했던 사우디아라비아 미드필더를 어제 같은 숙소에서 만났다. ‘한국 축구가 예전만 못한 것 같다’고 말하길래 ‘우리 성적을 봐라. 이번엔 우리가 우승할 것’이라고 대꾸했다”고 말했다. 이어 “냉정히 평가한다면 우승 확률은 50 대 50”이라며 “그러나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모른다. 우리 후배들이 조금만 더 힘내줬으면 하는 게 바람”이라고 당부했다.

호주가 현대 축구가 바라는 힘과 속도를 겸비한 축구를 구사하고 있지만, 후배들의 최근 경기력이라면 충분히 해볼 수 있다는 게 박 전 감독의 평가다. 특히 매 경기 탄탄해지고 있는 수비 조직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우리 선수들이 무실점이 깨졌을 때 흔들릴까 걱정일 정도”라며 활짝 웃었다. 여기에 한 가지 욕심낸다면 희생 정신을 발휘해달라는 주문이라고 했다. 과거 자신이 현역으로 뛸 때 아깝게 우승컵을 놓친 이유였던 탓이다. 박 전 감독은 “우승컵의 주인을 가르는 것은 바로 동료를 위한 희생이다. 동료를 위해 한발짝 더 뛰면서 공간을 만들고, 동료가 놓친 선수를 잡기 위해 뛰어야 한다. 우린 그러지 못했기에 우승을 놓쳤다. 후배들은 27년 만의 결승 진출에 만족하지 말고 55년 만의 우승을 욕심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들의 우승 도전이 한국 축구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표팀이 선전하면, 다시 그 토대인 K리그에 관심이 쏠리고, 다시 대표팀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박 전 감독은 “이제 한국 축구는 세계 무대로 재차 발돋움을 준비해야 한다. 아시안컵 우승이 러시아월드컵의 호성적으로 가는 발판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