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30일.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이날을 아주 슬픈 날로 기억할 것 같다.

야구 관계자와 열성 야구팬 할 것 없이 모두가 KBO 총재의 판단에 촉각을 곤두세울 날이 될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프로야구 수장인 KBO 총재의 권위가 어느새 몰락한 것인가, 아니면 각 구단이 비로소 자기 목소리 찾기에 나선 것일까. KBO는 이사회에서 히어로즈 가입금에 대한 용처 문제를 미리 정리해놓은 대로 1시간 만에 매듭지은 뒤 히어로즈의 트레이드 승인 여부에 대한 계획을 밝혔다. 

듣기에는 꽤 그럴싸했다. "히어로즈에 트레이드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했고, 그 내용에 따라 승인에 대한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28년 프로야구 역사를 뒤로 하고 신조어로 탄생한 '트레이드 계획서'에는 현금 액수와 교환 선수 수준까지 기입될 것이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그러나 히어로즈가 내놓기로 했다는 '트레이드 계획서'에 담길 세부 내용을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KBO가 히어로즈의 가입금 완납을 사실상 인정하자 다양한 경로로 히어로즈와 트레이드를 예고했던 삼성·두산은 경쟁하듯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히어로즈 세일즈의 첫 손님으로 이택근 영입을 공식화한 지 오래인 LG는 굳이 이날 경쟁에는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트레이드 계획서'도 당연히 허구의 것이 돼 버렸다. KBO로서는 비밀리에 받기로 한 '트레이드 계획서'를 세상 사람과 사이좋게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트레이드 순서가 시나리오에 어김이 없었던 것도 KBO로서는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이택근의 LG행에 이은 장원삼의 삼성행, 그리고 이현승의 두산행까지 모든 게 예고된 대로였다. 각 구단이 이미 트레이드 작업을 완료한 가운데 KBO에서 승인 약속까지 했다는 얘기까지 정설로 굳어지고 있으니 총재가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할 일은 이미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더구나 KBO 실무책임자인 이상일 사무총장은 "트레이드 승인은 KBO 총재의 고유권한"이라고 거듭 강조했는데 유영구 KBO 총재의 의지는 과연 누구를 통해 전파됐는지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 출신으로 야구계에 몸 담은 뒤 갖가지 구설수에 올랐던 신상우 전 총재 또한 트레이드 승인 권한만은 신성하게 활용했다. 지난해 장원삼이 현금 30억원에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승인 요청이 오자 이런저런 여론까지 살핀 뒤,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유 총재는 이른바 몇몇 구단의 의지에 따라 추대된 민선 총재다. 그래서 더 각 구단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추후 비슷한 사태가 일어나면 어떻게 중심축을 세울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