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마다 얼굴을 바꾸는 게 배우입니다. 그래서 배우에게는 ‘천의 얼굴’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지난 6일 개봉된 영화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 속 조여정과 <방자전>(2010) 속 조여정은 같으면서도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노출 수위가 높은 베드신이나 삼각관계, 권력과 사랑에 대한 욕망은 두 작품의 공통점이지만 어떻게 해소되는 지의 과정에서는 서로 다른 그림을 그려냅니다.

<방자전>의 춘향도, <후궁>의 화연도 출발점은 사랑입니다.

청풍각 기생의 딸인 <방자전>의 춘향은 숱한 남자들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이몽룡(류승범)의 몸종인 방자(김주혁)에게 빠집니다. 그에게는 양반들의 ‘찌질함’과 소심함 대신 남자다움과 자상함이 있기 때문이죠.

<후궁> 속 화연은 왕의 동생인 성원대군(김동욱)의 구애를 뿌리치고 한 집에서 자란 권유(김민준)를 사랑합니다. 화연이 후궁으로 간택돼 입궁해야 할 처지가 되자 권유와 함께 야반도주를 감행합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두 사람의 여정은 권력이라는 갈림길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신분 상승의 꿈을 버릴 수 없는 춘향은 방자를 사랑하면서도 몽룡이 과거 시험을 위해 한양으로 떠나기 전 정인 서약을 맺습니다. 장원 급제하고 돌아온 몽룡은 더 큰 출세를 위해 모종의 거래를 제안하고 춘향은 이를 받아들이죠.

춘향이 사랑 대신 권력이라는 달콤한 동아줄을 잡은 데 반해, 화연은 사랑을 위해 ‘권력의 용광로’인 궁으로 들어갑니다. 두 사람을 쫓아온 아버지가 권유를 죽이려 하자, 화연은 그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후궁이 됩니다. 권유를 잊지 못하면서도 원자를 낳고 중전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화연이 중전이라는 권력을 가지게 된 건 순전히 ‘이 죽일 놈의 사랑’ 때문입니다. 권유를 향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는 왕후가 아니라 그저 갑남을녀로 행복하게 살았겠죠. 신분상승을 위해 방자 대신 몽룡을 선택한 춘향과 화연은 질감이 다릅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두 인물의 색깔을 더욱 또렷해집니다. 화연의 아버지에게 거세당한 권유는 내시가 되어 입궁하지만 화연과 등집니다. 왕이 죽고, 권유에게도 버림받은 화연은 사랑을 이용해 권력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신분상승을 꿈꿨던 춘향은 몽룡에게 버림받고 좌절합니다. 몽룡에게 춘향은 출세의 도구일 뿐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에 좌절했을 때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됩니다.

춘향이 된 조여정은 분노를 내적으로 폭발시킵니다. 정신을 놓고 어린 아이처럼 되어버린 춘향은 순수한 표정으로 방자의 등에 업힙니다.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서야 겨우 안온함을 맛봅니다. 그를 품어준 건 결국 사랑입니다.

화연은 권력을 품기 위해 사랑을 이용합니다. 화연이 된 조여정은 아들과 자신의 생명을 위해 ‘여성성’을 이용한다. 권유에게 남은 사랑을 바닥까지 긁어내고, 성원대군의 짝사랑을 이용합니다. 결국 자신을 지키려 빼든 은장도는 밖을 향합니다. 조여정이 연기한 화연은 권력 앞에서 무섭도록 처절합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영화 속 조여정의 인생은 권력이라는 갈림길에서 <후궁>의 화연과 <방자전>의 춘향으로 전혀 다른 얼굴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배우 조여정은 천의 얼굴 중 두 개를 드러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