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결승 진출 좌절, 무위로 끝난 SK의 아시아 정벌. 하지만 소득도 있었다. 지난 13일 SK 왼손투수 이승호(27)는 일본프로야구를 농락했다. 재팬시리즈 우승팀 세이부 중심타선의 연속 삼진. 에이스 김광현이 일찍 내려갔지만 SK는 7회 등판해 3이닝을 완벽하게 막아낸 이승호의 활약으로 세이부를 이겼다. 3년 만에 부상에서 돌아온 올해, 이승호는 한국시리즈에서 후배 최정과 MVP를 다툴 만큼 가파른 상승세를 그리더니 아시아시리즈 일본전에서는 깜짝 스타로 등극했다. 2008년 가을, 이승호는 가능할까 싶었던 긴 재활을 뚫고 일어섰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결승 진출에 실패해 아쉬워하는 이승호를 도쿄돔이 내려다 보이는 숙소에서 만났다.

#2008년 부활의 정점, 생애 첫 일본전

이번 아시아시리즈에서 이승호의 ‘슬로 커브’가 눈에 띄었다.

세이부전 투구 수는 46개. 그런데 평소 던지지 않던 커브를 5개나 던졌다. 캐치볼할 때나 던지던, 시속 115~118㎞짜리 이승호의 커브는 이날 훨씬 느렸다. 이 슬로 커브에 일본 퍼시픽리그 홈런왕인 세이부의 4번 나카무라가 속절없이 당하며 삼진으로 물러났다.

포수 박경완이 사인을 냈다. 이승호는 “재팬시리즈에서 세이부 타자들이 커브에 당하는 것을 봤다. 평소 던지지 않는 커브 사인이 나왔는데 그래서인 것 같았다”며 “도쿄돔 마운드가 조금 높은 편이다. 각이 커지다보니 속도가 더 느려진 것 같다”고 했다.

세이부 코치진은 “처음 보는 투수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고, 이튿날 SK와 톈진 라이온즈(중국)의 경기를 중계하던 일본 방송 해설자들의 입에서는 이승호의 이름이 몇차례나 나왔다.

#볼이 낮아졌다

최고 시속 150㎞, 평균 145㎞였던 이승호의 구속은 지금 최고 146㎞다. 구속은 예전만 못하지만 대신 낮게 낮게 던지는 제구력을 얻었다.

공이 확실히 낮아졌다. 특히 낮게 떨어지는 슬라이더의 위력은 한국시리즈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세이부전에서 나온 슬로 커브도 단지 높은 도쿄돔 마운드 때문만은 아니다.

이승호는 부상에서 복귀하려던 지난해 말 마무리캠프에서부터 전력분석팀과 많은 얘기를 하며 스스로를 분석했다. 공이 높다는 지적을 계속해서 받았다. 게다가 볼끝도 좋지 않았다. 잘 던지다가도 얻어맞곤 하는 이유였다. 그래서 연습할 때도 무조건 낮게 던지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스프링캠프까지만 해도 잘 했는데 개막 직후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렇게 2군에 내려갔다. 거기서도 스프링캠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조건 낮게 던지는 연습은 이승호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김성근 감독과의 만남

공이 낮아진 데는 투구 동작의 변화도 큰 이유다.

김성근 감독은 이승호의 부활 이유로 간결해진 투구 동작을 꼽는다. 이전에는 지나치게 팔을 크게 돌려 공을 놓기까지 걸리던 시간이 1.5초였지만 지금은 1.3초까지 줄었다. 0.2초는 대단히 큰 차이다.

사실 이 변화에 올해 처음으로 한 시즌을 같이 치른 김 감독에 대한 이승호의 믿음이 들어있다.

“감독님을 만나고 나서 투구 폼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밝힌 이승호는 “선수를 많이 생각해주신다. 투구 폼 하나도, 많이 던지더라도 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하는 데 집중해 수정해주신다”고 했다.

5년 전, 한창 잘 나가던 때는 자신의 투구 폼이 자신에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재활을 거친 뒤 김 감독에게 배우면서 생각을 바꿨다.

투구 동작을 지적받은 것은 지난해 마무리훈련 때다. 팔을 크게 돌리다보면 아무래도 어깨 위쪽에 무리가 가기 마련. 더구나 3년 동안 재활한 뒤 자연스레 투구 동작이 둔해졌다. 이때부터 이승호는 의식적으로 작게 돌리는 연습을 했다.

#편해졌다

공은 낮아졌고 마음은 편해졌다. 부상 전, 잘 나갔던 이승호는 상대에 대해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각 팀의 선수들을 파악하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부상 이후 3년 만에 돌아오니 정말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겪는 타자가 많았고 전에 상대했던 선수들도 변해 있었다. 그것을 다시 알아가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언제 끝날지 몰라 불안했던 기나긴 재활을 뚫고 나오니 또 기다리고 있던 새로운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바닥에서 시작한 올해 2군을 거쳤고, 선발만 했던 이승호는 1년 동안 불펜을 지켰다. 그리고 한국시리즈를 거치면서 부활의 ‘정점’에 섰다. 이제는 시즌 초반과 달리 편하다고 했다.

#김광현, 과거의 내 모습

왼손 에이스. 2008년 김광현은 5년 전 이승호의 모습이다. 부상당하기 전 이승호는 SK의 기둥이었다. 신인이던 2000년에는 마무리도 겸업했다. 전천후 투수였다. 부상에서 어렵게 돌아오니 김광현이 있다. 7살 어린 후배 김광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역시 부상 얘기부터 했다. 김광현도 왼손 강속구 투수다.

“아무래도 빠른 공 투수니까 부상없게 조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올겨울엔 체인지업도

이제 올 시즌 일정이 모두 끝났다.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봤다.

11월까지는 인천에서 마무리훈련을 한 뒤 12월에는 친구들의 결혼식이 잔뜩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가지 못한 군산 부모님에게도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1월 스프링캠프에선 한가지 하고 싶은 게 있다. 체인지업을 연습해보려고 한다. 그동안 직구와 슬라이더 위주였던 구종에 체인지업을 더할 생각이다. 김 감독은 허리와 무릎 부상 중인 마무리 정대현이 겨울 동안 수술할 경우 내년 마무리로 이승호를 염두에 두고 있다.

과거 에이스에서 불펜으로 변신한 이승호. 한국시리즈에서는 좌완 스페셜리스트로, 아시아시리즈에서는 롱릴리프로 빛을 냈지만 내년에는 든든한 마무리로 또 새로운 자신을 찾을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