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강국이 흔들린다. 소치의 악몽을 씻겠다던 한국 쇼트트랙이 안방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세계 최강’의 체면을 구겼다.

한국은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8개와 은메달 4개, 동메달 8개로 ‘종합 4위’에 오르겠다는 ‘8-4-8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그 계획에는 쇼트트랙에 걸린 총 8개의 금메달 중 최소 5~6개에서 최대 7개까지 따낼 것이라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황대헌(19)과 최민정(20), 임효준(22) 등 한국 선수들이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올 시즌 세계랭킹에서 상위권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개막 전 AP통신은 한국이 쇼트트랙에서만 7개의 금메달을 따낼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일단 출발은 좋았다. 대회 초반 금메달을 잇따라 수확하며 8-4-8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임효준이 지난 10일 남자 1500m에서 첫 금메달을 안긴 데 이어 17일 최민정이 여자 1500m에서 금맥을 이었다. 지난 20일에는 여자 3000m 계주까지 정상에 올라 소치 올림픽에 이어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대회 전 평창 올림픽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힌 황대헌이 남자 1500m와 1000m에서 모두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악재 속에서도 이룬 결과라 기대는 더욱 높아졌다.

한국 쇼트트랙의 금빛 질주는 딱 거기까지였다. 금메달만 최대 3개 추가할 것으로 기대됐던 22일이 악몽의 날이 됐다.

단거리인 남자 500m에서 잔혹사가 재현됐다. 한국은 19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 채지훈이 금메달을 딴 이래 단 한 명도 정상에 오른 선수가 없다.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서 안현수(빅토르 안)가 결승에 올랐으나 동메달에 그치면서 3관왕(1000m·1500m·5000m 계주)에 만족해야 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선 성시백이 은메달을 딴 것이 최고 성적이었다.

황대헌과 임효준이 나란히 결승에 올라 24년 만의 첫 금메달에 도전했으나 금메달에는 한 걸음이 부족했다. 한국 선수들이 잠시 주춤한 사이 중국 우다징의 재빠른 스타트에 일격을 당했다. 황대헌과 임효준 모두 쉼없이 추격을 시도했지만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이번 대회에서 유독 불운에 시달렸던 황대헌이 첫 개인전 메달을 따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여자 1000m와 남자 5000m 계주에선 더욱 잔인한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 1000m 세계랭킹 1위로 대회 3관왕을 노리던 최민정과 개인전에서 첫 금메달을 꿈꾸던 심석희(21)가 부딪쳐 넘어지는 최악의 충돌사고가 일어났다. 남자 계주에서도 레이스 초반 넘어지며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최민정이 준결승에서 3위로 골인하고도 구제를 받아 결승에 오를 땐 금빛 희망에 부풀었다. 최민정이 1000m에서 금메달을 따낼 경우 토리노 올림픽 진선유 이후 12년 만의 쇼트트랙 3관왕도 가능했다. 3000m 계주에서 자신감을 되찾은 심석희도 대회 초반 부진을 털어내겠다는 각오로 결승까지 올랐다. 그러나 불운의 벽은 넘지 못했다. 심석희는 레이스 초반 선두를 달리고, 최민정이 뒤에서 역전을 노리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결승전 마지막 2바퀴를 남긴 시점에서 최민정이 외곽에서 역전을 꾀하다 심석희와 충돌해 넘어졌다. 악몽 같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