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긴장됐다. 충무로에서 술이 세기로 유명한 영화 ‘즐거운 인생’(감독 이준익, 제작 영화사아침·씨네월드)의 두 주인공 정진영과 김상호를 스포츠칸 새로운 코너 ‘스타 酒경야독’(스타와 낮에는 가볍게, 밤에는 독하게 마시면서 인터뷰하는 코너)의 첫 타자로 선정해놓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서울 충무로에 위치한 한 철판구이집. 두 사람의 단골집인지 식당 아줌마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맞았다. 정진영은 자리를 잡고 술이 나오자마자 소주를 맥주잔에 벌컥벌컥 따랐다. 놀란 기자가 “우리 인터뷰해야 하는데…”라고 말하려는 순간 찬물을 소주에 섞었다. 정진영은 “이렇게 마시면 소주의 톡 쏘는 맛은 사라지지만 시원하고 술이 술술 넘어간다”며 한잔을 건넸다. 김상호는 “찬물도 좋지만 얼음을 넣어 먹는 게 숙취 방지에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두 배우와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지만 잔을 더할수록 후유증이 깊어지는 ‘물폭탄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1교시, 술

먼저 이들의 주량이 얼마인지 궁금해졌다. 정진영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천천히 오랫동안 마시는 스타일이야. 몸이 예전 같지 않은지 자꾸 필름이 끊겨”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진영의 체력은 아직 젊은 사람 못지않다는 후문이다. 김상호는 “형님은 폭주는 안 하시고 천천히 마라톤을 뛰듯이 꾸준히 드시는 스타일”이라며 “한번 발동이 걸리면 대부분 새벽까지 간다”며 증언했다.

김상호는 자신의 정확한 주량을 모른다. 그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술의 한계가 얼만지 모르고 그냥 누구에게 지지 않는 정도”라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술을 즐겁게 먹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먹은 술병수를 세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영화 ‘즐거운 인생’의 촬영장에는 술 좋아하는 배우들이 주인공이어선지 협찬받은 소주와 백세주가 넘쳐났다. 김상호는 “김윤석 형도 우리 못지않게 술을 좋아해요. 매일 밤 촬영 끝나면 이준익 감독과 배우들이 함께 모여 술을 없앴죠”라고 즐거웠던 그 당시를 회상했다. 김상호가 정진영, 김윤석을 ‘형님’으로 부르는 게 왠지 낯설었다. 김상호는 외모로는 최고참 같지만 사실 유일하게 30대다. 1970년생으로 올해 38세. 정진영보다 6살이나 어리다. 정진영이 “나는 처음에 얘가 나보다 나이 훨씬 많은 줄 알았어요. 잘못 했으면 선생님으로 불렀을 거야~”라고 말하자 폭소가 터져나왔다.

김상호도 외모 때문에 겪은 고충을 털어놓았다. “현장에 처음 가면 무조건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그러고 나서 나중에 나이를 알고는 오히려 화를 내더라고요.” 자세히 뜯어보니 머리숱이 없는 걸 빼고는 눈빛은 무척 젊어보였다.

#2교시, 음악

술잔을 더할수록 두 사람의 말이 다 받아적기 힘들 정도로 많아졌다. 정진영과 김상호가 영화 속에서 선보인 기타와 드럼 실력은 엄청난 노력의 산물이었다. 정진영은 이 영화를 촬영하기 전에는 록음악에 문외한이었고 전자음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원래 포크 음악만 좋아했어요. 통기타만 칠 줄 알았죠. 그리고 전자음이 너무 인공적인 것 같아 듣기 싫었어요. 하지만 이번 영화를 위해 전자 기타를 배우면서 록음악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게 됐어요. 얼마 전 촬영 끝난 후 오랜만에 쳐보았는데 가슴속이 찌릿하던데요”

정진영은 최근 차기작 ‘님은 먼곳에’를 위해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자기타도 힘들었지만 색소폰은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아무리 불어도 당최 소리가 나지 않더라고요. 담배를 어서 끊어야지. 정말.”

김상호는 드럼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그는 “드럼을 치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을 잘 조절해야 한다”며 “조절을 못하면 박자가 빨라져 연주가 엉망이 된다”고 말했다.

#3교시, 교육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를 때 이날 시사회에서 영화를 처음 본 정진영의 부인과 아들의 전화가 왔다. 정진영은 초등학교 3학년생 아들은 두고 있고, 김상호는 네 살 된 아들에 현재 아내가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정진영은 “아들이 영화가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며 어떤 평론가의 칭찬보다 더 듣기 좋은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암울한 우리 나라 교육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정진영은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외국에 나가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 슬퍼요. 부모나 아이들 모두에게 못할 짓이야”라고 개탄하며 한잔을 들이켰다. 영화 속에서 부인과 자녀가 캐나다에 유학간 ‘기러기 아빠’ 혁수를 연기한 김상호도 이에 동조했다. 그는 “요즘 아이들은 주입식 교육을 받아선지 자기 표현력이 전혀 없는 것 같다”며 “내 아이들은 서툴더라도 자기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애들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4교시, 행복

분위기가 무르익어 이제 누가 따라주지 않아도 알아서 따라 마시는 단계까지 왔다. 영화 ‘즐거운 인생’에서 사회와 가정에서 내몰린 세 주인공의 삶은 밴드를 만들었다고 해서 나아진 게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꿈을 찾고 행복감을 오랜만에 맛본다. 정진영은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게 행복해질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봐요”라고 ‘행복론’을 설파했다.

김상호는 “꿈과 행복은 거창해야만 좋은 게 아니죠. 작고 소박한 꿈이라도 자기 자신이 만족하는 게 중요하죠”라고 말했다. 연극무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김상호는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하다.

“전 제가 사람 구실 못할 줄 알았어요. 영화를 하면서 돈도 벌게 되고 부인에게 돈을 갖다주게 됐죠. 너무 내가 대견해서 아침마다 나올 때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며 ‘너 참 대단해’라고 말하며 내 머리를 내가 쓰다듬어줘요”

김상호의 너스레에 한바탕 폭소가 터져나왔다. 인터뷰, 아니 술자리가 시작된 지 4시간이 지나 밤 11시. 마지막으로 흥행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두 배우는 긴장된 미소를 지었다. 두 배우는 입을 모아 “정말 열심히 찍었고 좋은 작품이기 때문에 흥행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서 “우리가 영화를 찍었을 때 행복감이 관객들에게 전이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밤 12시, 소주 8병이 사라진 후에야 인터뷰가 종료됐다. 술에 있어서는 ‘고독한 마라토너’인 정진영의 손에 이끌려 3차까지 간 뒤에야 매니저들의 만류로 자리가 끝난 시간은 오전 3시. 이 밤이 ‘즐거운 인생’으로 막을 내렸지만 내일 아침 숙취로 ‘괴로운 인생’을 맞게될 게 뻔했다.

〈글 최재욱기자·사진 튜브스튜디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