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날씨에 시원한 바람이 불던 가을날, 배우 박철민과 서울 정동길에서 만났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잠시 정동길을 걸으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산책을 마치고 고층 건물 사이에 아기자기하게 자리잡은 오픈 카페에 마주앉아 가벼운 식사와 함께 촉매제 역할을 위한 도구로 와인을 선택하기로 했다. 와인리스트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에게 “왠지 와인보다는 소주나 막걸리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자 “그건 편견입니다. 나도 와인을 즐길 줄 안답니다”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잠시 그의 입에서 와인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전문가 수준은 아니었지만 분명 와인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배우 또는 연예인이라는 직업

인터뷰를 시작하자 최근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이 잇따라 뒤숭숭한 분위기와 리플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화제에 올랐다. 시청자와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해온 박철민이지만 그 또한 리플로 인해 때론 힘을 얻기도 하고 때론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특유의 밝은 성격 탓에 마음에 담아두는 일은 많지 않다.

“배우는 참 매력적인 직업이죠.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하지만 그래서 더 예민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각기 다른 반응에 좀더 의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어요.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은 만큼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지난 2일 사망한 최진실에 대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를 떠나보내는 것은 참 슬픈 일”이라면서 “부디 따뜻하고 푸근한 곳으로 가셔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애도했다.

▲코믹하거나 과장되거나

박철민은 현재 방송중인 MBC 수목극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는 배용기 역을 맡아 작품의 재미를 더하는 코믹 캐릭터로 활약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의 연기를 ‘과장됐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전작 ‘뉴하트’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이번에 말을 더듬고 ‘킁킁’거리는 것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의지만 앞선 배용기의 급한 성격 탓에 나오는 습관으로 설정을 했어요. 재미와 웃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배용기의 어두운 과거사에서 비롯된 버릇인 셈이죠. 그런데 재미있어 하는 분들도 있고, 답답하고 지저분하다고 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연기를 한다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박철민에게는 잔인하고 사악한 모습도 숨겨져 있다. 영화 ‘혈의누’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에서 보여준 독한 모습은 그가 웃음만 주는 배우가 아님을 증명했다. 하지만 워낙 코믹한 이미지가 강한게 사실이다. 그는 “사악하고 잔인한 캐릭터에 도전하고 싶고 충분히 잘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지만 유쾌한 이미지 때문인지 제작자들이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트럼펫 연주 실력

‘베토벤 바이러스’를 위해 촬영에 앞서 2개월가량 연습을 했지만 트럼펫 연주는 쉽지 않았다. 다만 그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오랜 연기 경력을 발휘해 노력하고 있다.

“두달 동안 연습을 했는데 ‘삑’ 소리 내는 것도 힘들어요. 게다가 원래 음치에 박치라서 어려움이 많아요. 그래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손가락 움직임과 감정, 분위기에 맞춰 연주하는 화면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애를 쓰죠. 재능은 제로이지만 그래도 트럼펫 선생님께서 입가의 주름만큼은 명인의 냄새가 난다고 칭찬을 해줬어요. 과거에는 늙어 보인다고 해서 싫어했지만 오히려 그 주름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죠.”

▲박철민의 취미

박철민은 작품 활동이 끊이지 않고 있고, 현재 ‘베토벤 바이러스’와 함께 드라마 ‘일지매’ 촬영을 병행하고 있어 일주일 동안 두 촬영장을 오고가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그가 여유시간이 생기면 무엇을 할까? 취미를 묻는 질문에 돌아온 답은 조금은 의외였다.

“여가시간은 요가를 하면서 보내요. 원래는 등산을 좋아했는데 지난해부터 요가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요가는 등산처럼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고, 장소를 가릴 필요도 없잖아요. 요가를 하니 근육을 깨우고, 느릿하게 돌던 피도 생동감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뇌도 맑아지는 느낌이고(웃음).”

▲달라진 인기 실감

박철민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데 옆 건물에서 박철민을 발견한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박철민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화답하자 다시 “사인 받으러 가도 돼요?”라는 물음이 왔다. 박철민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엿보이자 기자가 한발 물러섰다. 사인을 받으러 온 이들은 박철민과 악수를 나누며 반가워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이 떠난 후 “인기가 대단하네요”라고 말하자 그렇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인기가 있다는 것은 물론 기분이 좋은 일이지만 크게 신경쓰는 편은 아니에요. 앞으로도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대중에게 웃음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끊임없이 향기를 전하는 꽃이 되고 싶고, 언젠가는 만개할 수도 있겠죠. 만개를 하는 순간이 오지 않더라도 그저 향기만이라도 전할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하죠.”

어느새 주문한 와인 한병이 바닥을 드러냈다. 박철민은 와인 한병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더 주문을 하려고 했지만 이튿날 일찍부터 촬영이 예정돼 있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자리를 파하기로 했다. 다음번에는 와인이 아닌 소주 한잔 하자는 약속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