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막바지 어느 일요일 어스름 저녁, 가수 장윤정과의 술판이 시작됐다. SBS ‘인기가요’를 마치자마자 장윤정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헐레벌떡’…. 기자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좋은가?’라는 착각까지. 각설하고, 장소는 서교동 ‘불고기 브라더스’. 첫만남은 맨송맨송… 의례적인 인사가 오갔다. 장윤정을 앨범 낼 때마다 봐 왔지만, ‘주경야독’을 위한 술자리라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술이 필요하다.

▲ 술 권하는 윤정네

주경야독! 원칙은 지킨다. 낮이니 주경(酒輕, 낮엔 약한 술)이다. 와인으로 약하게 시작하기로 했다. 와인 잔에 와인 붓고, 장윤정과 한껏 ‘친한 척’을 하며 사진 한방! 둘 다 연기력이 출중하다. 준비과정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밖은 이내 레드와인처럼 짙게 땅거미가 내렸다.

다시 원칙 고수다. 이제부터는 야독(夜毒·저녁엔 독한 술)이어야 한다. 궁리 끝에 장윤정에게 와인 잔을 버리고 소주잔으로 바꿔, 깨끗하게 ‘원샷’하자는 제안을 던졌다. 주종을 바꾸지 않는 선에서 ‘독하게 먹어보자’는 생각에서다. 예상외로 장윤정의 답변은 ‘오케이’. 사단은 그렇게 시작됐다.

술 앞에서 장윤정은 내숭을 부리지 않았다. 와인이 담긴 소주잔을 첫 약속처럼 원샷으로 입에 털어넣었고, 빈 술잔을 가만히 놔두는 법도 없었다. 술 앞에 당당한 그녀는 ‘주경야독’을 더욱 거나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게 모두 집안 분위기에서 나오는 듯 싶었다. 장윤정은 술 권하는 집안 문화에 젖어 있었다고 했다.

스케줄 탓에 친구 만나기도 쉽지 않고, 한잔 술이 생각나도 마땅히 함께 술잔을 기울일 사람이 없다. 이때 어머니는 장윤정의 밥상 위에 ‘×사춘’을 올려 놓는다. 유일하게 즐기는 술이 이것이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술 권하는 모습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비해 한 술 더 뜬다.

“강원도 원주 집에 내려가 지내시는 아버지는 내가 ‘×사춘’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직접 산사나무를 뜰에 심기까지 했다.”

장윤정도 ‘효심과 흑심’을 가득 담아 아버지께 경운기를 사드리며, 산사나무를 열심히 가꿀 하드웨어를 선물했다. 아버지와 경운기, 그리고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강원도의 산하가 장윤정의 음주 문화를 위해 오늘도 산사나무를 살찌우고 있다.

▲ 첫사랑은 대학 2학년 때

장윤정이 최근 내놓은 베스트앨범 ‘더 앙코르’의 타이틀곡은 ‘첫사랑’이다. 가을에 추억하기 좋은 아이템도 첫사랑이다. 와인 한 병을 거덜낸 후 또 한병의 와인이 소주잔과의 춤을 준비할 때, 첫사랑 얘기를 꺼냈다. 술기운에 의지하기 시작한 ‘주경야독’의 취기 어린 인터뷰는 조금씩 ‘골뱅이과’로 흘러가고 있었다.

“첫사랑은 대학 2학년 때 동갑내기였다. 한 2년쯤 사귄 것 같다. 당시 사랑표현에 적극적이었다. 사랑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 아닌가. 첫키스? 그건 내가 간직하고 싶은 비밀이니 묻지 말아달라.”

술자리를 같이한 매니저와 소속사 직원이 모두 쌍심지를 켜고 눈짓 손짓으로 더 이상의 이야기 진전을 막았다. 더 이상의 답변은 기대할 수 없었다. 쩝! 이때 ‘친절한 윤정씨’가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이었다.

“과거보다는 미래가 중요하다. 결혼은 서른 한 살쯤 하고 싶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때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상형? 부모님 공경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그 말속에 효녀 장윤정의 실체를 알 수 있어 술 대신 미소 한 모금을 머금을 수 있었다. 이제 남자보다 팬들을 만날 때가 더 많은 장윤정은 공연 중 며느리 삼겠다는 말을 한두번 들은 것이 아니다. 개중에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40대 초반의 한 팬은 자신의 승용차에 장윤정의 모습을 코팅해서 공연마다 쫓아다녔다. 모습은 열성팬 그 자체였지만, 언제나 몇 걸음 뒤에서 지킬 것은 지키면서 그녀를 응원했다. 한 2년을 그렇게 따라다니던 그 팬은 이제 장윤정의 공연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궁금해 하던 차에 그 팬으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이제 좀더 먼발치에서 장윤정을 응원하겠다”는 한마디.

▲ 술자리의 진수, 타깃 정해 바보 만들기

세번째 와인이 들어왔다. 소주잔을 핏빛으로 물들인 모습이 좋지 않아, 잔도 바꿔달라고 생떼를 썼다. 여전히 원샷 릴레이는 멈춰지지 않았다. 원샷에 장사없듯, ‘술취한 윤정씨’도 말이 많아졌다. 이야기 주제가 앞에서 조용히 고깃점을 먹고 있던 매니저 전수진 실장에게도 전이됐다. “전실장님 너무 재밌다”고 운을 뗀 장윤정은 속사포처럼 전수진 실장의 황당 에피소드를 쏟아냈다.

“행사장에 들어갈 때 안내원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서울에서 왔다’고 대답하지 않나, ‘어떻게 왔느냐’고 하면 ‘보면 모르느냐 차를 타고 왔다’고 하는 통에 차에 탄 우리나 물어본 안내원이 모두 뒤집어진다.”

세번째 들어온 와인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밑바닥을 드러냈다. 이제부터 술이 술을 먹는 시간이다. 장윤정의 똘망한 눈도 조금씩 초점을 놓치는 게 보였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물이 올랐고, ‘주경야독’ 참가자들의 몸에는 술이 올랐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소속사 관계자들은 ‘주경야독’에 마침표를 종용했다. 아쉽지만, 그렇게 끝을 맺고 끌려가듯 밴에 탄 장윤정의 눈에 ‘한잔 더’라고 외치는 소리 없는 메아리가 담긴 듯 보였다.

〈글 강석봉·사진 김기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