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전 시작과 함께 그는 골대 뒤편에서 부지런히 몸을 풀었다. 홍명보 감독이 부를 순간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뛰고 또 뛰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벤치에서 사인이 왔다. 드디어 한(恨) 서린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근호(29·상주)는 18일 브라질 쿠이아바 판타나우 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러시아전 후반 11분에 마침내 월드컵 그라운드에 섰다. 0-0으로 팽팽한 경기에서 공격의 물꼬를 트라는 특명을 안고 나섰다.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근호는 4년 전의 아픔을 씻어내리라 다짐했다.

지난 2010년 남아공월드컵은 그에겐 기억하기 싫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맹활약하며 7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이끌었지만 그는 정작 남아공에 가지 못했다. 평가전에서 계속된 부진 탓에 월드컵 직전 치러진 오스트리아 전지훈련 때 최종 엔트리에 제외되는 비운을 겪었다. 절치부심하며 4년을 기다려온 그는 지난달 홍명보 감독의 선택을 받고 브라질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뽑혔다.

그는 대표팀 소집 훈련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월드컵의 아픔을 안고 있는 그의 움직임에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주전이 아니라도 좋았다. 그에게 주어진 ‘조커’의 임무를 다하겠다는 굳은 각오로 월드컵을 준비했다.

후반 11분 박주영과 교체돼 들어간 이근호는 특유의 활발하고 파괴력 있는 움직임으로 러시아 수비진을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과감함이 폭발했다. 후반 23분 미드필드 진영에서 단독 돌파를 하던 그는 페널티박스 앞에서 회심의 중거리슛을 시도했다. 힘있게 날아간 볼을 러시아 골키퍼 이고리 아킨페예프가 쳐내려했지만 공은 그대로 골문을 통과했다. 4년을 기다려온 월드컵 데뷔 무대에서 선제골을 터뜨린 것이다.

경기 후 이근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는 “운이 좋았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나왔던 것 같다”면서 감격해했다. 이어 “설움을 떨치는 상상이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이근호는 “당초 동료에게 패스를 할 생각이었다”면서 “그러나 슈팅 연습을 할 때 받았던 좋은 느낌이 갑자기 떠올라 과감하게 슈팅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한풀이에 성공한 이근호는 한층 커진 자신감을 무기로 더 큰 비상을 꿈꾼다. 16강의 발판을 마련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젠 한국의 16강행을 결정짓는 해결사가 되길 꿈꾼다. 컨디션과 몸 상태가 좋은 데다 골맛까지 본 자신감이 있어 무서울 게 없다. 홍명보 감독도 이근호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고 있어 알제리·벨기에전 때도 승부처에서 중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근호는 “알제리전에서는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아픔을 안고 4년을 기다려온 이근호의 화려한 반전 드라마가 브라질에서 화려하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