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일본 고지에서 전지훈련 중이던 이승호의 방으로 전화했다.

SK행이 결정된 다음날 바로 일본으로 가는 바람에 하지 못했던 통화를 위해서였다. 그때 시각, 밤 10시였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들려온 “여보세요” 소리. 자다 깬 게 분명한 목소리였다.

당황해 “자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다 죽어가는 소리로 “그렇다”고 하기에 “그럼 나중에 통화하자”고 얼른 끊었다.

SK 선수가 됐으니 야간훈련은 기본일 터. 일부러 훈련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 전화였는데, 하루종일 훈련한 이승호는 들어오자마자 지쳐 쓰러져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나중에 이승호는 “혹시 꿈이었는 지 모르겠는데 전화하지 않았느냐”면서 “미안했다”며 전화를 했다. 꿈이었는 지 생시였는 지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더 미안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이승호는 캠프에서 3000개를 던졌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는 무려 4000개를 던졌다.

간혹 훈련 많이 하는 팀의 20대 초반 투수들이 그렇게 던진다. 하지만 76년생 투수가 소화하기에는 쉽지 않은 투구수다.

LG에서 김성근 감독과 함께 했던 8년 전 마무리훈련에서 매일 500개씩 던지고 에이스로 거듭났던 이승호는 30대 중반인 지금 김 감독을 다시 만나 그렇게 또 쉼없이 던졌다.

10년을 뛴 팀에서, 한때는 에이스였는데 FA 보상선수로 풀려버린 허탈함에 오기도 있었다. 참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 채 운동했지만 포기한 적은 없다.

“절실한데 안 되니까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죠. 정말 힘들긴 했지만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이번 시리즈를 준비할 때도 하루 150개를 던졌는데, 좋더라고요. 내년이 기대된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 어제는 또 여섯살짜리 딸이 경기 전에 전화해서 ‘아빠 오늘 야구 잘 하세요’ 이러더라고요. 신기하고 웃기기도 하고. 수비하다 넘어지는 거 보고는 울었대요. 이제 커서 야구도 볼 줄 알고 아빠 자랑도 한다니까 힘도 나고 더 잘 해야죠.”

어린 딸의 응원을 받고 힘을 불끈 낸 지난 3차전. 덕아웃에 앉아 플레이볼을 기다리던 이승호는 전광판을 보다 8년 전을 떠올렸다.

9-6으로 앞선 8회말 등판해 볼넷으로 주자를 내보내고 이상훈에게 공을 넘겼다. 이상훈은 9회 이승엽에게 동점 3점홈런, 최원호는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우승을 넘겨줬다. LG와 삼성의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이었다.

그때 힘없이 내려오던 이승호에게 “투수가 그러는 거 아니다. 고개 들라”고 나무라던 형 이상훈, 우승한 삼성 선수들을 보며 엉엉 울던 막내 투수 이동현까지. 8년이 지난 뒤 그때와 똑같은 대구구장 1루 덕아웃에서 한국시리즈를 함께 하자니 그때 생각이 저절로 났다.

한국시리즈라고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만 같았는데, 이승호는 3차전 승리투수가 됐다. 8년 전 고개숙였던 그 마운드에서 데뷔 12년만에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승리투수가 됐다.

경기가 끝나고, 기자회견을 마치고, 또 숙소로 돌아가니 많은 전화와 문자가 왔다. LG 동생들, 심수창과 김광수의 축하도 빠지지 않았다.

“(이)동현이도 한국시리즈 전에 전화왔어요. 꼭 삼성 누르고 우승하라고요. 숙소 돌아가서는 (김)재현 형하고도 많은 얘기 했고요.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이)상훈 형이죠. 지금 마운드에 올라가고 내려올 때 뛰는 것도 상훈형 때문이거든요. 제가 잘하지 못하니까 연락도 못 드리겠더라고요. 한 번 뵙고 싶네요.”

시련의 세월을 견딘 이승호는 SK의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정말 힘껏 던졌다. 아팠던 8년 전 기억도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