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16강.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확실한 증표를 받아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까지 오르는 신화를 만들어냈지만, 홈 어드밴티지 덕을 봤다는 외부 시선 탓에 그간 찜찜한 기운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번 16강 진출은 개운치 않은 느낌까지 날려버린 청량제가 된 느낌이다.

너무나 먼 길을 달려왔기에 어렵사리 손에 넣은 열매가 더욱 달콤했다. 한국은 54년 스위스 대회에 첫 출전을 한 이후로 꽤 오랜 세월 월드컵을 높디 높은 산으로 여겨야했다.

#이동하다 끝난 첫 대회 

1954년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 모습은 월드컵 전체 역사에도 회자된다.

성적이 처참했기 때문이다. 사실, 원정도 보통 원정이 아니었다. 

한국 대표팀은 미군 전용기 등을 타고 무려 60여 시간의 여정 끝에 스위스에 도착했다. 당시 최강이던 헝가리전이 열리기 전날, 간신히 대회 현지에 발을 내딛었으니 요즘처럼 시차적응은 논할 게재도 아니었다.

결과는 뻔했다. 당시 한국은 전반 12분만에 헝가리 골잡이 푸스카스에게 첫 골을 내준 뒤로 9골이나 허용했다. 0-9 대패. 슈팅의 질 자체가 달랐다고 한다. 당시 골기퍼였던 고(故) 홍덕영 선생은 헝가리의 슛 세례를 몸을 날려 막았지만 남은 것은 소나기 골과 시퍼런 멍 투성이었다.

터키와 2차전도 크게 나을 게 없었다. 전반에만 4골을 내준 뒤로 0-7 대패. 한국은 2패한 뒤 서독과 3차전도 치르지 못하고 귀국했다. 2라운드 탈락과 함께 대진 자체도 사라졌다. 

#32년만의 월드컵 도전

지역 예선부터 '32년만의 본선 진출'이라는 말이 구호처럼 따라붙었다. 이번 대회 같으면 '원정 16강' 같은 식이었다. 

기어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티켓을 거머쥔 한국은 해외파 차범근·허정무와 최순호·조광래·박창선 등 국내파 에이스를 앞세워 16강 진출을 노렸다. 그러나 첫 상대가 하필이면 당시 최강 아르헨티나였다. 한국은 세계축구를 대표하던 디에고 마라도나의 개인기에 휘둘렸고, 결국 1-3으로 졌다. 박창선의 중거리 만회골로 월드컵 첫골을 기록하는 데 의미를 둬야했다. 이후 한국은 불가리아와 1-1로 비겨 첫 승점을 올리며 잠재력을 확인했지만 또 다른 축구 강국 이탈리아에 2-3으로 져 아쉬움 끝에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야했다.
#다시 실감한 세계의 벽

가능성을 확인한 한국 대표팀은 90년 이탈리아 대회에서는 조금 더 나은 성적을 확신했다. 86년 대회에선 막내이던 김주성이 아시아 최고스타로 자라난 데다 최순호 등 기존 멤버들도 경험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는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는 것도 그리 어렵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또 다시 만난 월드컵은 쉽지 않았다. 조별예선 첫 경기인 벨기에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0-2로 진 뒤로 스페인(1-3), 우루과이(0-1)에 내리 지며 3전 전패, 최악의 성적을 남기고 말았다.

94년 미국 대회도 아쉬움만 남겼다. 첫 상대인 스페인에 0-2로 끌려가다 후반 막바지에 홍명보의 중거리포와 서정원의 동점골로 무승부로 마무리하며 16강 희망을 불태웠다. 그러나 반드시 잡아야했던 볼리비아의 문전만 노크하다 0-0으로 비기며 한숨을 내시고, 최종전인 독일과 경기에서도 0-3으로 뒤지다가 후반 들어 황선홍·홍명보의 연속 골로 무섭게 따라붙었지만 그 이상의 스토리는 만들지 못했다.

차범근 감독이 이끈 98년 프랑스 대회는 더욱 아팠다. 조별예선 첫 경기 멕시코전에서 첫 골을 넣은 하석주가 백태클로 퇴장당한 뒤로 1-3으로 졌고, 네덜란드에 0-5로 진 뒤로는 차 감독이 중도 경질되는 참사까지 벌어졌다. 

이후 벨기에전에서 분전했지만 1-1로 비기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한국축구, 세계무대로 뛰다

안방에서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폴란드를 2-0으로 꺾은 뒤 미국과 1-1로 비겼지만 포르투칼을 1-0으로 제치고 16강에 올랐다. 이후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혈전 끝에 잡으며 4강. 결승티켓을 다툰 독일전에서 0-1로 패하고, 3·4위전에 터키에 졌지만 말 그대로 꿈 같은 일을 현실로 만든 해였다. 

2006년 독일 대회에서도 한국은 당당했다. 티켓을 다툰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스위스에 0-2로 져 눈앞까지 배달됐던 16강티켓이 사라졌지만 1차전서 토고를 2-1로 꺾어 원정 첫승을 맛보고 강적 프랑스와도 1-1로 비기는 경기력을 보였다. 

한국은 더 이상 세계무대에서도 약팀이 아니었다. 2010년 6월 남아공에서 한국 축구의 위상이 제대로 확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