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파일] 각본에 있다면‘없는 물건’도 뚝딱

입력 : 2007.03.13 22:00

낡은 전기밥솥과 전천후 커피 자판기. 정윤철 감독의 영화 ‘좋지 아니한가’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나아가 폭소를 자아내는 장면에 나오는 소품이다.

극중에서 밥솥은 뚜껑과 몸통을 끈으로 질끈 묶어야 한몸이 돼 제 기능을 발휘한다. 폭발 일보 직전인, 마침내 폭발하는 심씨(천호진)네 가족 상황을 상징한다. 커피 자판기는 커다란 액정화면에 라디오와 MP3플레이어 기능까지 갖췄다. 심씨의 아내(문희경)가 다단계 조직원(이기우)에게 속아 구입한 이 자판기는 밥솥과 상반된 의미를 지닌다.

이 영화 소품팀은 밥솥부터 만들었다. 낡은 밥솥을 구입, 뚜껑을 분리한 뒤 압력을 가하는 호스와 밥이 지어질 때 수증기가 발생하도록 해주는 호스를 함께 연결해 밥통이 터지도록 했다.

뚜껑이 날아가는 세기와 각도, 수증기의 양과 밥풀의 찰기 등 모든 조건이 한번에 충족되도록 부상을 무릅쓴 숱한 테스트를 거쳐 완성했다.

커피 자판기도 마찬가지. 소품팀은 시중에 없는 제품을 시나리오에 썼을 리 없다고 판단, 1주일 동안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구할 수가 없어 직접 만들었다. 디자인이 가장 흡사한, 국내에 없는 독일산을 구입해 부가 기능을 추가했다. 앞면에 자동차 오디오용 액정화면을 정착하고, 라디오와 MP3플레이어 기능을 연결하는 대대적인 작업을 가졌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판기를 만든 뒤 소품팀은 특허신청을 고려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소품은 극중 상황의 사실감을 나타낸다. 극중 이야기와 맞지 않은 소품은 드라마의 현실성을 떨어뜨린다.

극중에서 필요한 소품을 구하지 못했거나 못만들 경우에는 해당 장면을 수정·삭제해야 할 만큼 드라마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놈 목소리’에서 주인공 부부의 아파트 내부와 유괴된 아들이 놀던 아파트 지하는 세트를 만들어 찍었다. 1991년에 발생한 사건을 다루는 만큼 그 당시에 맞는 소품을 마련하는 데 박진표 감독이 직접 나섰다.

박감독은 자신의 집은 물론 전 스태프의 집을 돌아다니며 적절한 가구·옷·책·장난감·그림 등을 세트로 실어 날랐다. 옛날 자동차는 대여료가 하루 평균 40만원인 점을 감안, 제작비 절감을 위해 12대를 구입했다. 옛날 차 동호회를 통해 여러 대를 대여하기도 했다. 범인이 아이 부모를 괴롭히는 데 사용한, 구시대 산물이 돼버린 당시에 유행했던 카폰은 만들었다.

국내에서 구입이 가능한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불가능할 때에는 외국산을 수입해서 쓴다. ‘좋지 아니한가’의 커피 자판기처럼 외국에서 구입, 개조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도 저도 어려울 때에는 아예 현지로 가서 촬영하기도 한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소품 담당은 연꽃 때문에 애간장을 태웠다. 조씨부인(이미숙)의 안채와 사랑채를 이어주는 조그만 다리 밑의 연못에 연꽃이 피어 있어야 하는데 국내에선 연꽃이 6월에 피기 때문에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품팀은 고민 끝에 인터넷에 연꽃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다. 화훼 수입상으로부터 샘플을 세차례에 걸쳐 받은 뒤 태국 및 베트남산을 구입했다. 그런데 꽃을 뿌리(흙)까지 들여올 수 없었다. 흙은 반입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꽃과 꽃잎을 따로 구매했다. 1개월여 촬영기간 동안(3~4월) 필요할 때마다 공수해 사용했다. 5차례에 걸쳐 잎은 경북 칠곡에서, 50송이의 꽃과 줄기는 화훼상을 통해 구입했다. 한번 가져오는 데 잎은 30만원, 꽃과 줄기를 공수해 오는 데에는 50만원이 들었다.

‘쉬리’ ‘로스트메모리스 2009’ 등은 총기와 총알을 미국에서 구입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미국과 홍콩의 가격을 비교, 총은 홍콩에서 들여왔다. 총알은 격발시 연기가 많이 나는 게 필요해 미국에서 샀다. ‘이재수의 난’은 까마귀를 프랑스에서 조련사까지 함께 데려왔다. 촬영 당일 까마귀가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했다.

‘오아시스’에서 새끼 코끼리가 나오는 장면은 코끼리를 들여올 수 없고, 국내 동물원에서 위험하다고 빌려주지 않아 태국에 가서 찍었다.

〈배장수 선임기자 came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