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에는 여느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쥐부리글려’(사진) 장면이 나온다. 제작진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몇 줄의 자료에 의존해 조선시대 궁녀들 사이에 은밀하게 행해진 ‘쥐부리글려’를 재창조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혈의 누’ ‘왕의 남자’ 등에 이어 또 하나의 사극 영화 화제작 ‘궁녀’가 18일 개봉된다. ‘궁녀’는 ‘궁중 미스터리’를 표방한 사극. 의문의 죽음을 둘러싼 궁녀들의 삶을 극화했다. 이전 사극과는 또 다른 드라마와 영상이 흥미롭다.
# 궁녀, 업무·직급 제각각
궁녀(宮女)라고 다 같은 궁녀가 아니다. 조선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궁녀’(감독 김미정·제작 영화사 아침)에는 ‘내의녀’ ‘지밀 궁녀’ ‘수방 궁녀’ 등 각 궁녀의 업무와 이에 따른 의상 등이 소개된다.
‘내의녀’(內醫女)는 궁 안 여성의 치료를 담당했다. 여성 범죄자를 조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박진희가 미궁에 빠진 궁녀의 자살 사건을 파헤치는 천령 역을 맡았다. 자살한 궁녀는 월령(서영희). 월령은 지밀(至密) 궁녀로 왕비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 심부름은 물론 마음도 달래주는 역할을 맡았다. 옥진(임정은)은 수방(繡房) 궁녀다. 왕비의 옷과 이부자리 등 궁중 물품에 수를 놓는 일을 했다.
제작진에 따르면 궁녀는 7개 부서에 소속됐다. 지밀·수궁 외 침방(針房)·생과방(生果房)·세수간(洗水間)·세답방(洗踏房)·소주방(燒廚房) 등이다. 침방은 왕·왕비의 옷·이부자리 등을, 생과방은 왕의 수라 및 음료와 과자를 만들었다. 세수간은 왕·왕비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고 지(요강)·매화틀(변기) 등의 시중을 담당했다. 세답방은 세탁·다듬이질·다림질·염색을 맡았다. 소주방은 조석 수라를 관장(안소주방)하거나 잔치음식(바깥소주방)을 만들었다.
이 가운데 최상급 부서는 왕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지밀’이었다. 지밀의 수석 상궁은 조정 대신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소속 궁녀를 선발하는 과정도 가장 까다로웠다. 지밀 다음으로 위계가 높은 부서는 침방과 수방이다. 이에 따라 지밀·침방·수방 궁녀들은 타 부서와 구분하기 위해 옷 입는 법과 머리 모양 등에 차별을 두었다.
‘궁녀’에는 또 제조상궁·부제조상궁·감찰상궁 등이 나온다. 제조상궁(손영순)은 일명 큰방상궁으로 수백 궁녀의 장이다.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대소사를 주관하므로 학식이 많고 인물도 빼어나야 했다. 부제조상궁(전소현)은 제조상궁 아래 차석으로 내전 금고를 관리했다. 감찰상궁(김성령)은 궁녀들의 음란·모함·사치 등 부정부패를 감시·조사하고 처벌하는 업무를 맡았다.
궁녀들의 다양한 의상과 헤어 스타일은 ‘왕의 남자’ 등의 심현섭 감독과 손미경 원장이 맡았다. 호박 노리개, 바느질통, 4000권이 넘는 고서, 자수장, 단두대, 참수대 등 갖가지 소품은 ‘예의 없는 것들’ 등의 박재완씨의 수작업을 통해 완성됐다. 영화는 경희궁·덕수궁·창경궁을 비롯해 수원 화성행궁, 고창 읍성, 드라마 ‘대장금’ 테마파크, 부안 영상테마파크와 파주 세트장 등에서 찍었다.
# 무시무시한 궁녀 수칙
‘궁녀’는 후궁 희빈(윤세아)을 보좌하는 월령이 서까래에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을 다룬다. 조사 결과 월령은 출산을 한 것으로 드러난다. 정절을 지켜야 하는 수칙을 어긴 것이다. 감찰상궁은 사건을 자살로 은폐하라고 한다. 그럼에도 천령은 사건을 자살로 위장된 치정살인으로 보고 내막을 파헤친다.
‘궁녀’에 따르면 정절을 지키지 못한 궁녀는 참형에 처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손목을 잘랐고, 함부로 입을 놀리면 혀를 뽑았다. 4~10세에 입궐한 궁녀들은 15년 동안 궁중 법도와 학문 등을 입힌 뒤 ‘관례식’을 치르고 정식 궁녀가 된 뒤 평생을 궁 안에서 살아야 했다.
궁녀는 살아서는 궁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가뭄이 심하거나 중병이 들었을 때, 모시던 상전이 승하했을 때에는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 다만 나간 뒤에는 비구니가 되거나 함께 모여 살아야 했다. 가뭄에 궁녀를 내보낸 이유는 결혼하지 못한 여인의 한이 하늘에 닿아 날이 가물다고 믿어 이들의 원통한 마음을 풀어줘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궁녀들의 삶은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부모 및 본인들이 원해도 아무나 궁녀가 될 수 없었다. 훗날 왕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상 중에 죄인이 없어야 하고 ▲식구 가운데 좋지 않은 병을 앓았다거나 불구자가 없어야 하며 ▲용모와 품성이 좋아야 하고 ▲처녀여야 했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처녀여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 조사는 10세 이상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의녀가 앵무새의 생혈을 여자의 팔목에 묻혀서 이것이 묻으면 처녀이고,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정했다. 앵무새를 선택한 이유는 이 새가 남녀 간의 화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 새의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며 장차 남녀 간에 불화가 예상된다고 해석했다.
‘궁녀’는 이밖에 ‘쥐부리글려’ ‘방중술’ ‘국문장’ 등을 보여준다. ‘쥐부리글려’는 섣달 그믐 밤, 새로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 말조심을 일깨워주기 위한 행사다. 궁녀들에게 숨어들었을지 모르는 잡귀를 몰아내는 주술 행사이기도 했다. ‘방중술’은 발 뒤꿈치 들고 걷기, 엉덩이를 든 채로 걸레질하기, 홍시 핥아먹기, 무릎으로 팥알 집어 올리기 등 궁녀들이 왕을 사로잡기 위해 익혀야 했던 성생활의 방법과 기술을 엿보여 준다.
〈배장수 선임기자 cameo@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