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 촬영 적합한 모텔 찾으려 6개월간 발품 팔아
사랑은 모텔·호텔·여관에서. ‘추격자’ ‘바람피기 좋은 날’ ‘너는 내 운명’ ‘아는 여자’ ‘생활의 발견’ ‘엽기적인 그녀’ 등 한국영화의 남녀상열지사는 모텔·호텔·여관에서 시작된다. 남녀 주인공 등이 묵는 이곳의 방 호수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 모텔을 찾아라
화제작 ‘추격자’는 전직 형사 중호(김윤석)가 운영하는 보도방의 여인이 프로방스모텔 301호를 찾으면서 시작된다. ‘바람피기 좋은 날’에서 작은새(윤진서)와 여우두마리(이종혁)가 이용하는 모텔의 호수는 304호다. 이 밖에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연애의 목적’ ‘너는 내운명’ ‘외출’의 사랑은 각각 엑스포·아테네·금수·삼흥모텔 등에서 이뤄진다.
제작진은 극중에 어울리는 모텔을 찾느라 발품을 적잖게 팔았다. 일례로 개봉 31일 만에, 올들어 최단기간에 400만명을 동원한 ‘추격자’는 적합한 모텔을 찾는 데 6개월이 넘게 걸렸다. 촬영횟수를 줄이기 위해 외부와 내부를 함께 찍을 수 있는 게 관건이었다. 결국은 포기하고 외부는 인천의 프로방스모텔, 내부는 의정부의 신라모텔에서 찍었다.
나홍진 감독은 이에 대해 “3층은 사고가 난 뒤 중호가 그 정도 높이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게 적당하다고 설정했다”며 “301호에서 찍은 것은 그 방이 가장 넓어 촬영하는 데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복도에 있는 비상등은 제작진이 설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에서 인구(한석규)는 하룻밤에 엑스포 모텔을 두번 찾는다. 결혼을 앞두고 찾아온 전 애인(최반야), 요즘 만나기 시작한 혜란(김지수)과 함께. 이 모텔은 신촌에 있다. 내·외부 모두 이곳에서 찍었다.
# 사랑은 숙박업소에서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김승우)가 선희(송선미)와 하룻밤은 보내는 곳은 팬션 노을빛은혜 204호거나 206호다. 둘의 관계를 눈치챈 문숙(고현정)은 술에 취해 이 방 문 앞에서 잠든다. 중래와 선희는 다음날 205호 베란다를 통해 빠져나온다. 문숙은 훗날 중래에게 중래가 딴 여자와 잔 것보다 두 사람이 잠든 자신의 위를 넘어가지 않았느냐고 집요하게 따진다.
‘손님은 왕이다’에서 이발사 창진(성지루)의 비극은 숙박업소 106호에서 바람을 피우려다가 시작된다.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에서 인구(한석규)가 장애우인 형(이한위)을 위해 콜걸을 만나게 해주는 곳은 모텔 쉘부르의 702호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김상경)와 선영(추상미)은 콩코드호텔 410호에서 뜨거운 사이가 된다.
‘아는 여자’와 ‘엽기적인 그녀’의 사랑은 남녀 가운데 한 사람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점화된다. ‘아는 여자’에서 이영(이나영)이 만취한 치성(정재영)을 짊어지고 들어간 호텔방은 808호, ‘엽기적인 그녀’에서 견우(차태현)가 인사불성인 그녀(전지현)를 업고 들어간 여관방은 405호다.
‘아는 여자’는 경기 파주의 관광호텔 808호에서 찍었다. 808호는 호텔 직원들이 묵는 방으로 장진 감독 등 제작진이 ‘묻지마 패밀리’ 때 이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규모가 커 장면 촬영에 용이하고, 여자가 남자를 8층까지 힘들게 데리고 들어갔다는 의미를 지녔다.
‘엽기적인 그녀’의 여관은 극중에 부천에 있는 곳이지만 촬영은 부산에 있는 억수장에서 했다. 곽재용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여관 이름을 억수장으로 지었고, 전국을 뒤져 찾아낸 곳이다. 이틀 동안 연달아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여자를 업고 4층까지 낑낑대고 걸어올라간 남자에게 ‘억수로’ 재수 없는, 그렇지만 결국에는 억수로 재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여관 외경은 부산이지만 405호 내부는 세트다.
‘오! 수정’에서 수정(이은주)과 재훈(정보석)이 처음으로 섹스를 하는 호텔방은 308호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약속을 미루자던 수정은 재훈의 통사정에 마음을 바꾼다. 방 번호는 이때 재훈의 말을 통해 드러난다. 이들의 섹스 장면은 수유리의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하루 동안 찍었다.
# 방 번호의 의미는?
1999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작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에서 두 중년 남녀가 1주일에 한번씩 이른바 ‘묻지마 섹스’를 하는 호텔방은 118호, 1996년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수상작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알코올 중독자와 창녀가 묵었던 모텔방은 207호다. 멜로 영화 수작 ‘첨밀밀’에서 남녀 주인공이 미혼 때는 물론 각각 결혼한 뒤에 다시 연정을 불태우는 여관방은 527호다.
제작진이 어떤 이유로 이 호수를 택했는지 알 수 없다. 서양에서는 7, 중화권에서는 8이 행운의 숫자이고 서양에서는 13, 동양에선 4를 불길한 숫자로 여긴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호텔에는 4층, 서양에는 13층이 없다.
그런데 ‘모텔 선인장’에서 네 주인공이 만나는 방은 407호다. 박기용 감독은 “모텔에 4층이 없다는 점과 영화가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점을 감안해 가상의 4층으로 설정했다”면서 “방 번호는 이런저런 논의 끝에 4와 7이 발음상 더 어울리는 것 같아 407호로 정했을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한 호텔 1207호에서 여인의 변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이때 카메라는 12층에 있는 다른 여러 방의 갖가지 모습을 한눈에 보여준다. ‘연애의 목적’에서 화해한 유림(박해일)과 홍(강혜정)이 아테네 모텔에서 함께한 뒤 걸어가는, 눈 내리는 길 좌우로는 상호가 제각각인 모텔과 여관이 즐비하다. 중반의 다소 후줄근한 종로의 모텔 거리와 대조적인 전주의 이 모텔 거리 장면은 두 남녀의 사랑이 만개하는 걸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