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에 설경구는 곤충학자(왼쪽), 김태희는 유리 공예가(오른쪽)로 등장한다. 직업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읽게 해주는 이들은 토닥토닥 다투던 중 심경이 변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부부싸움을 한다.
곤충학 교수, 유리 공예가, 프로파일러 형사, 은폐 전문 해결사…. 개봉을 앞둔 국내외 영화에 나오는 직업이다. 개봉한 영화에선 궁녀, 요리사, 스카우트, 포르노 배우·감독 등도 등장한다. 이처럼 직업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 직업으로 캐릭터 소개
곤충학 교수와 유리 공예가는 부부갈등을 다룬 ‘싸움’에 나온다. ‘하드보일드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한 이 영화의 한지승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 당시 곤충학은 고려대, 유리 공예는 남서울대학의 협조를 받았다.
극중에서 상민(설경구)은 홍다리 사슴벌레를 애지중지 키운다. 한감독은 “이 벌레가 일부일처제를 고수하는 습성을 지녔다”며 “진아(김태희)의 직업을 유리공예가로 설정한 건 유리공예품이 깨지기 쉽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감독에 따르면 김태희는 유리공방 플럭스(Flux) 소속 작가 세 분에게 디자인·생산 관련 교육을 받았다.
프로파일러 형사는 양윤호 감독의 ‘가면’, 은폐 전문 해결사는 토니 길로이 감독의 ‘마이클 클레이튼’에 나오는 직업이다. 프로파일러(Profiler)는 범죄심리 분석관. ‘가면’에서 은주(김민선)는 범죄현장의 각종 증거와 정황을 분석, 범인의 심리·성격·행동·직업 등을 좁히는 작업을 통해 사건 수사를 돕는다. 해결사(Fixer)는 말 그대로 사건을 해결해 주는 사람. 극중에서 검사 출신 특수 변호사인 클레이튼(조지 클루니)은 합법적으로 처리가 불가능한 사건을 은폐하여 고객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일을 한다.
미스터리 스릴러 ‘가면’에는 네일 아티스트도 등장한다. 강력계 형사 경윤(김강우)의 연인 수진(이수경)의 직업이다. 양감독은 “수진은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하는 예술가로서 섬세한 여성적 매력을 지녔다”면서 “국제적 명성을 자랑하는 ‘엔퓨오 네일크리에이션’에서 촬영할 때 오현정 원장의 지도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이처럼 극중 인물의 직업과 캐릭터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에서 유나(엄정화)는 쇼핑 도우미인 퍼스널 쇼퍼(Personal shopper), 소여(한채영)는 조명 디자이너다. 유나는 일밖에 모르는 건설회사 대표 영준(이동건)의 의상 등을 조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도 엮어간다. 소여는 각양각색의 전구를 이용해 조명을 연출하듯 호텔리어인 민재(박용우)와의 사랑을 디자인한다.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경재(김아중)의 직업은 예술제본사, ‘애인’에서 여자(성현아)의 직업은 매듭 전문가다. 광태(봉태규)가 맡긴 ‘열려라 비디오 10000’을 희귀본으로 제본, 책의 외양을 돋보이게 바꿔주고 수명도 연장시켜 주는 경재는 바람둥이 광태와의 사랑도 새롭게 제본해 낸다. ‘애인’에서 각종 장식용 매듭을 다루는 여자는 나비매듭 팔찌 등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파란자건거’에서 어릴 때 사고로 한쪽 손을 잃고 의수를 한 동규(양진우)는 동물원에서 코로 모든 것을 들 수 있는 코끼리를 돌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 극중 직업 실제로 등장
황정민·임수정 주연의 ‘행복’은 개봉 당시 홈페이지를 통해 이색 모바일 서비스를 했다. 임수정의 “우리 같이 살래요?”라는 고백과 황정민의 “니가 좀 떠나줘!”라는 이별 통보 서비스를 제공해 화제를 낳았다.
이별 통보 서비스는 영화 ‘새드 무비’에서 소개된 바 있다. 하석(차태현)의 이별 대행업이다. 하석은 헤어지려는 남녀로부터 일을 의뢰받은 뒤 상대방을 찾아가 대신 이별을 통보한다. 하석은 이 과정에 화가 난 당사자로부터 뺨을 맞곤 한다. 이와 달리 ‘Mr. 히치: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에서 히치(윌 스미스)의 직업은 남녀 간의 사랑이 이뤄지도록 도와주는 데이트 코치다.
알리바이 컨설턴트, 옷장 정리 전문가, 동물 의사 소통가, 기억 제거사…. 영화에 나온 이색 직업이다. ‘알리바이’에서 레이(스티브 쿠간)의 직업은 알리바이 컨설턴트. 결혼을 앞둔 주요 고객 아들의 연애 행각을 신부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작해 주다가 곤혹을 치른다. ‘브로큰 플라워’에서 주인공 돈(빌 머레이)이 만나는 옛 애인 로라(샤론 스톤)와 카르멘(제시카 랭)의 직업은 옷장 정리 전문가와 동물 의사 소통가다. 로라는 불쑥 찾아온 돈에게 “벌이가 꽤 괜찮다”고 말한다.
동물들의 의사에 관한 저서도 낸 카르멘도 바쁘기는 마찬가지. 예약 일정에 쫓겨 오랜만에 만난 돈과의 대화를 중단한다. ‘이터널 션샤인’에서 ‘라쿠나’라는 회사 관계자들은 첨단 기기를 이용해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등 고객들이 지우고 싶어 하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제거해 준다. 직업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김기덕 감독의 ‘악어’에서 용패(조재현)는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찾아주고 가족들에게 사례비를 받는 것으로 살아간다. 전수일 감독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S(정보석)는 자살 도우미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각종 노하우를 제공해 준다.
‘잘 살아보세’에서 석구(이범수)와 현주(김정은)는 ‘아들·딸 구분 없이 둘만 낳아 잘 키우자’는 가족계획 계몽을 위해 여느 부부의 밤일을 관리하는 보건소 직원으로 나왔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에 알리바이 컨설턴트가 실제로 등장해 주목을 끌었다. 언젠가는 ‘아일랜드’에 나오는 복제인간 제조회사도 실제로 설립될 수 있을 듯하다.
〈배장수 선임기자 cameo@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