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여자’에서 치성(정재영)과 이연(이나영)의 고교 시절과 현재는 경주시 사정동에서 1주일 동안 찍었다. 제작진은 촬영에 앞서 이곳에 전봇대를 만들어 세웠다. 마을 주민들은 이 전봇대가 예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착각했다.
전봇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비롯된 요즘 세간의 화제 가운데 하나다. “탁상행정·규제 철폐를 상징한다” “무조건 뽑는 게 능사냐?”…. 영화계에서도 전봇대에 얽힌 일화가 많다.
# 전봇대를 뽑아라
영화 촬영에 얽힌 일화 중에는 전봇대에 관한 게 많다. 장소는 적당한데 극중에 맞지 않은 전봇대가 있거나 전망을 망쳐놓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아름다운 시절’(2002) ‘내 마음의 풍금’(1999) ‘이재수의 난’(1998) ‘서편제’(1993) 등을 들 수 있다.
‘아름다운 시절’(감독 이광모)은 한국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한 휴먼드라마다. 미군과 양공주들이 정사를 나누는 시골 방앗간 장면은 전북 임실에서 찍었다. 문제는 전봇대. 이감독은 한국전력의 협조를 얻어 6개의 전봇대를 뽑아낸 뒤에 촬영했다.
‘내 마음의 풍금’(이영재)은 열일곱살 늦깎이 초등학생 홍연(전도연)과 스물한 살 총각선생 수하(이병헌)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홍연의 마을은 전남 장성, 초등학교는 전북 고창, 수하의 하숙집은 경북 양동, 홍연과 수하의 이별 장면은 강원도 정선에서 찍었다. 시대와 장소가 1960년대 산골인 만큼 제작진은 전봇대를 피해 찍느라 애를 먹었다. 홍연과 수하가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관청의 허가를 받아 오솔길을 만들어 찍은 뒤 원래대로 복구해 놓았다.
‘이재수의 난’(박광수)은 제주도에서 찍었다. 전봇대를 10여개나 뽑아냈고 촬영을 마친 뒤에 다시 세워놓았다. TV안테나도 주인의 동의를 얻어 모두 일일이 철거한 뒤 다시 달아주었으며 시멘트 길에는 흙을 뿌렸다.
‘서편제’(임권택)에선 나무가 아니라 시멘트 전봇대인 게 걸림돌이 됐다. 제작진은 고심 끝에 목재상에서 나무껍질을 사다가 시멘트 전봇대에 입히고 페인트 칠을 했다. 시멘트 전봇대를 나무 전봇대로 만든 다음에 촬영한 것이다.
# 전봇대를 세워라
김정식 감독의 ‘잎새’(2001)에서는 전봇대가 중요하다. 주인공 민규(박정철)의 직업이 전기수리공이고 그가 전봇대에 올라가 있는 장면이 꽤 많기 때문이다. 민규와 다혜(최유정)의 사랑도 전봇대에 붙여지고 떼어지는 전단을 계기로 이뤄진다.
‘잎새’는 원래 부산영상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부산에서 촬영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배우들의 스케줄 때문에 부산에서 찍는 게 불가능했다. 제작진은 서둘러 장소를 물색, 서울 창신동 주택가에서 찍었다. 실제 전봇대는 위험하기 때문에 제작진은 한국전력의 지원을 받아 창신동 일대에 가짜 전봇대 7개를 설치했다. 전봇대 장면은 이곳에서 2개월 동안 20회쯤 찍었다. 촬영장 부근이 일방통행 길이어서 제작진은 촬영을 할 때마다 차량과 행인을 통제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전봇대를 찾아라
사람들은 첫눈에 반해 사랑하게 됐을 때 감전(感電)됐다고 한다. 서로 뜻이 같을 때에는 전기가 통했다고 한다.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2004)에는 이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선(電線)에는 전기만 흐르는 게 아니다. 사랑도 흐른다. ‘사랑은 전선(전기)을 타고’라고 할까. ‘아는 여자’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 속 영화(액자영화) 형식으로 담겨 있다.
액자영화는 치성(정재영)과 이연(이나영)이 함께 본 영화이다. 이 영화는 치성의 내레이션 형식으로, 두 남녀의 사랑을 지켜본 전봇대의 시점으로 펼쳐진다.
두 남녀는 전봇대 아래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출세하려던 남자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간 잊고 있던 고향의 여자와 전봇대를 떠올린다. 남자가 눈 앞의 전봇대에 손을 갖다대자 변압기에 불꽃이 일고 그것은 수많은 전봇대를 통해 이어진 전선을 타고 시골로 전해진다. 전봇대 아래에서 죽어가던 여자는 전봇대 꼭대기에 이는 불꽃을 보고 남자의 사랑을 느낀 뒤 평온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이 ‘전봇대영화’는 치성과 이연의 사랑 이야기를 상징한다. 영화 후반부에 치성이 이연을 향해 먼 길을 달려가 만나는 것으로 변주된다. 그럼에도 다소 튄다는 점이 염려돼 최종 편집 때 잘릴 뻔했다. 투자·배급을 맡은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이 넣자고 권유해 살아났다.
어쨌든 제작진은 이 장면 촬영을 앞두고 극중에 어울리는 전봇대를 찾기 위해 발품을 적잖게 팔아야 했다. 장감독이 필요로 했던 전봇대는 주변에 건물이 없고 옛날 분위기가 나는 것. 제작진은 이같은 전봇대를 찾아 전국을 누볐다. 시골의 전봇대는 경기도 발안에서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장감독과 일행은 판교와 화성을 거쳐 발안까지 걸어다녔다. 서울의 전봇대는 태평로 삼성플라자 뒤에 있는 것이다. 서울과 시골 사이의 숱한 전봇대는 제작진이 장소 헌팅 때 캠코더에 찍어온 것을 활용했다.
편집에서 잘렸지만 치성이 달려가 이연을 만나기 직전 주택가에 있는 전봇대는 서울 양재대로에서 찍은 것을 모델로 제작진이 경주시 사정동에 만들어 세웠다. 그 모양이 감쪽같아 마을 주민들은 이 전봇대가 예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장감독은 전봇대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장감독은 이를 자신의 감독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에서 도둑들의 대화 장면 때 전봇대가 엿듣는 것으로 활용했고, ‘혈통 깊은 전봇대’라는 장편 영화를 기획하기도 했다. ‘아는 여자’에 담겨 있는 전봇대 이야기는 ‘혈통 깊은 전봇대’의 요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