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에서 1940년대 신사와 신여성을 대표하는 동원(김태우)과 인영(김보경)이 경성 거리를 걷고 있다. 이 장면은 ‘야인시대’ 등을 찍은 부천세트장을 개조한 뒤에 촬영했다.
‘황진이’ ‘화려한 휴가’ ‘기담’ ‘작은 연못’ ‘방각본’ ‘라듸오 데이즈’ ‘모던 보이’ ‘신기전’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 놈’…. 2007년 충무로의 시계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있다. ‘황진이’ ‘방각본’ ‘신기전’ 등은 조선시대, ‘기담’ ‘라듸오 데이즈’ ‘작은 연못’ ‘모던 보이’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등은 1930~1950년대, ‘화려한 휴가’ 등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아스팔트를 덮어라
시대극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당시 건물·거리 등의 재현이다. 특히 1930~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경우 제작진은 고역을 치른다. 당시 건물·거리 등이 남아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기담’은 1940년대 경성 최고의 서양식 병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공포영화다. 제작진은 촬영에 앞서 경기도 양수리 한국종합촬영소 등에 1300평 이상의 세트를 지었다. 특히 1년여 동안 스케치·미니어처·3D 시뮬레이션 작업을 거쳐 완성한 안생병원은 서양식 건축양식을 기조로 한 건물 외관은 물론 실내도 일본식 소품과 디자인이 혼재된 공간으로 꾸몄다. 공간과 공간이 조각난 기존 세트 구성과는 달리 복도와 계단까지 그대로 연결되어 실제 동선을 100% 구현할 수 있는 구조로 제작했다.
제작진은 또 당시 거리를 재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숱한 장소 물색을 거쳐 선정된 부천·목포·부산·청태산 등의 오픈 세트에서 촬영할 당시에는 수십 포대의 흙을 공수하여 아스팔트를 덮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전차와 자동차, 새로 제작해 설치한 간판과 쇼윈도 장식, 산 길에 쌓인 눈까지 온 정성을 쏟았다. 자동차의 경우 국내에 3대가 있다는 포드 디럭스 세단, 각각 1대뿐인 시보레 마스터와 캐딜락 플리트우드 등 당시 최고 부유층이 탔던 자동차들을 공수하였다.
제작진은 이와 함께 의상·헤어스타일 등을 통해 경성의 풍미를 살리는 데에도 역점을 뒀다. 일례로 엘리트 의사로 나오는 인영(김보경)과 동원(김태우)은 맥고모자와 하이힐, 파마 머리 등 당시 신사와 신여성의 모습을 완벽히 보여준다. 인영은 공포 영화 속 여주인공에게 연상되는 긴 머리가 아닌 단발 웨이브로 등장하는데 이는 그 시대 신여성을 대표하는 스타일이었다. 100만원을 호가하는 동원의 안경도 그 당시 지식인들을 상징하는 아이템이다. 또한 영화 속 의사와 간호사들이 입는 흰 병원복을 위해 우선 10개 이상의 다양한 재질과 색감의 흰 천을 입수해 수작업으로 구김 작업과 염색을 달리하고 실제 카메라 테스트까지 마친 후에야 인물에게 입히는 꼼꼼한 과정을 거쳤다.
#전봇대를 없애라
시대극을 찍을 때 겪은 애환 가운데에는 전봇대에 얽힌 내용이 많은 편이다. 장소는 좋은데 시대에 맞지 않는 전봇대가 있거나 전망을 망쳐놓는 경우가 허다해 고역을 치르는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아름다운 시절’ ‘이재수의 난’ ‘내 마음의 풍금’ ‘서편제’ 등을 들 수 있다.
‘아름다운 시절’(이광모)은 한국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한 휴먼드라마다. 미군과 양공주들이 정사를 나누는 시골 방앗간 장면은 전북 임실에서 찍었다. 문제는 전봇대였다. 이감독은 한국전력의 협조를 얻어 6개의 전봇대를 뽑아낸 뒤에 촬영했다.
제주도에서 찍은 ‘이재수의 난’(박광수)에서는 무려 10여개나 뽑아냈고 촬영을 마친 뒤에 다시 세워놓았다. 전봇대는 물론 TV안테나도 주인의 동의를 얻어 모두 일일이 철거한 뒤 다시 달아주었으며 시멘트 길에는 흙을 뿌렸다. ‘내 마음의 풍금’(이영재)은 강원도 산간에서 촬영할 계획이었지만 어렵게 찾아낸 후보지마다 전봇대가 문제돼 결국 전북 고창에서 찍었다.
‘서편제’(임권택)에서는 전봇대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무가 아니라 시멘트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애를 먹였다. 제작진은 고심 끝에 목재상에서 나무껍질을 사다가 시멘트 전봇대에 입혔다. 꼭대기 부분은 페인트 칠을 했다. 시멘트 전봇대를 나무 전봇대로 만든 다음에 촬영한 것이다.
요즘은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발달해 전봇대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시절’ ‘이재수의 난’ ‘서편제’ 등의 에피소드는 불과 10여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됐다. 전봇대는 물론 어울리지 않는 건물도 CG로 지워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황진이’에서 놈이(유지태)가 한양에 있는 황진이(송혜교)와 혼담이 오가는 양반집을 찾아간 장면은 서울 남산의 한옥 마을이 보이도록 찍었는데 주변에 있는 현대식 건물은 CG로 지운 뒤 초가 등을 그려넣었다.
〈배장수 선임기자 cameo@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