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방비도시’의 홍용택·기택(사진)은 김병옥이 맡았다. 연극으로 관록을 쌓은 김병옥은 영화 ‘친절한 금자씨’ ‘음란서생’ ‘짝패’ ‘예의없는 것들’ ‘해바라기’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이상기 감독은 “형 덕분에 만족스런 장면을 만들 수 있었다”고 밝혔다.
영화 ‘무방비도시’에는 쌍둥이 형제가 나온다. 소매치기 조직 삼성파의 백장미(손예진)에 의해 무너지는 쌍둥이파의 홍용택·기택이다. 한 장면에 동시에 등장하기도 하는 이들은 실제로 쌍둥이가 아니다. 한 배우가 해냈다. 이처럼 한 배우가 외모가 판박이인 두 인물을 해낸 장면은 ‘인어공주’ ‘범죄의 재구성’ ‘킬리만자로’ ‘현상수배’ 등에서도 선보였다.
#“내가 하고 싶은데…”
‘무방비도시’(감독 이상기)는 ‘리얼 소매치기 범죄액션’을 표방한 작품이다. 소매치기 조직 쌍둥이파는 이상기 감독의 1년여 취재과정에서 비롯됐다. 소매치기 조직 가운데 의외로 형제·자매가 많다는 데에 착안, 삼성파의 최대 라이벌 조직을 아예 쌍둥이파로 설정한 것이다.
이 조직의 홍용택·기택 역은 김병옥이 해냈다. 그런데 그의 원래 배역은 삼성파의 ‘기계’(조직원들의 도움 아래 금품을 직접 터는 인물)였다. 시나리오를 읽고 이감독에게 용택·기택 역을 하고 싶다고 피력, 그의 연기력을 익히 알고 있는 이감독이 받아들여 1인 2역을 하게 됐다.
용택·기택이 함께 나오는 것은 쌍둥이파가 안마를 받고 있는 삼성파의 기계(박길수)를 급습한 장면에서 볼 수 있다. 김병옥은 머리 모양, 양복, 말투 등을 바꿔 용택·기택 역을 해냈다.
이감독은 이 장면을 촬영할 때 모션 컨트롤 카메라(MCC)를 사용했다. 먼저 동생 기택이 수하들과 안마시술소를 급습한 장면을 찍었다. 기택 등이 급습에 성공한 뒤 나타나는 용택의 위치·시선 등은 조명대와 테니스공으로 잡아놓고 이를 이용해 용택의 언행을 찍었다. 그리고 후반작업 때 두 장면을 합성, 용택·기택이 마주보고 ‘씨익’ 웃는 모습을 만들었다.
#전도연, 현재·과거 오가
한 배우가 두 배역을 해낸 화제작으로는 ‘인어공주’(박흥식)가 우선 손꼽힌다. 두 인물이 동시에 나오는 장면 시간(러닝타임 107분 가운데 10여분)이 긴 데에다 기술적 완성도 또한 뛰어나다.
1인 2역을 한 주인공은 전도연이다. 그는 목욕탕 때밀이인 중년 엄마(고두심)의 딸인 은행원 나영과 엄마가 20대였을 때인 해녀 연순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전도연 역시 ‘무방비도시’의 김병옥처럼 높낮이가 조절되는 받침대에 테니스공을 놓고 눈높이를 그 공에 맞췄다. 테니스공이 상대 인물의 눈인 것이다. 미국영화 ‘어댑테이션’에서 니컬러스 케이지는 골프공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순과 나영은 ‘무방비도시’의 용택·기택과 달리 대화를 나누고 접촉도 한다. 그런 만큼 난이도가 높다. 연순과 나영의 말과 행동을 각각 찍은 뒤에 합성, 두 인물이 한 것과 다름없어야 하는 것이다.
전도연은 대사는 먼저 찍은 인물의 말을 이어폰을 통해 들으면서 시차를 맞췄다. 이어폰은 훗날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통해 지웠다. 해녀 연순이 은행원 나영에게 편지를 주면서 읽어달라고 하는 장면은 전도연이 분장을 다시 하는 1시간여 동안 앞서 찍은 편지의 위치·방향 등이 바람에 조금이라도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 칸막이를 설치해 놓고 찍었다. 반면 나영이 연순에게 전보칠 주소가 적힌 쪽지를 전달하는 장면에선 대역(보디 더블·Body Double)을 썼다. 제작진은 전도연과 얼굴 옆모습이 흡사하고 키 등이 비슷한 인물을 찾아내느라 고역을 치렀다.
#박중훈, 닮은꼴 1인 2역 원조
박중훈과 박신양도 닮은꼴 1인 2역을 해낸 배우로 유명하다. 박중훈은 1997년 9월에 개봉된 ‘현상수배’(정흥순)에서 닮은 인물 두 명이 동시에 나오는 한국영화 원조이다. 박신양은 ‘킬리만자로’(오승욱)와 ‘범죄의 재구성’(최동훈), 두 편에서 1인 2역을 했다.
‘현상수배’에서 박중훈은 살인사건 용의자인 마피아 써니와 그를 빼닮은 유학생 지니 역을 맡았다. 두 인물이 조우하는 장면은 이야기가 3분의 2쯤 전개됐을 때 나온다. 지니와 써니가 만나는 시간은 30초 정도이지만 촬영에는 약 5시간이 걸렸다. 한번은 지니, 또 한번은 써니, 그리고 이들이 함께하는 장소만 찍어 세 장면을 합성했다. 박중훈은 대역을 쓰지 않고 앞서 찍은 장면을 참고로 연기했다.
‘범죄의 재구성’과 ‘킬리만자로’에서 각각 외모가 닮은 형과 동생으로 출연했다.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소설가이자 헌책방 사장인 형과 교도소에서 막 나온 사기꾼 동생, ‘킬리만자로’에선 깡패인 동생과 악질 형사인 형으로 출연했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형제는 한 식당에서 만난다. 박신양은 4시간에 걸쳐 특수분장을 한 뒤 형으로 등장, 동생처럼 꾸민 대역을 놓고 연기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접촉할 때에는 대역을 쓰지 않았다. 앞서 찍은 장면이 보이도록 모니터를 틀어놓고 허공에 대고 손동작 등을 했다. 1분쯤 되는 이 장면은 이틀에 걸쳐 찍었다. ‘킬리만자로’도 ‘범죄의 구성’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찍었다.
인간 복제를 소재로 한 ‘멀티 플리시티’(1996)에는 각기 다른 키니(마이클 키튼) 4명이, 오는 24일 개봉되는 ‘굿나잇’에서는 개리(마틴 프리만)의 꿈속에 5명의 애나(페넬로페 크루즈)가 한 화면에 나온다. 한국영화에서도 이같은 장면을 볼 날이 머지않았다.
〈배장수기자 cameo@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