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에 비상이 걸렸다. 서울메트로 측이 최근 영화 촬영 지원을 중단한 것이다. 사전 약조를 어긴 ‘내사랑’이 화근이다. 오는 22일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나비 두더지’와 ‘내부 순환선’이 개봉되는 등 지하철과 기차가 주요 공간인 영화가 급증하는 추세여서 서울메트로의 향후 방침이 주목된다.
# 사랑은 지하철에서
![[충무로 파일]영화속 지하철·기차, 사랑은 2호선 순환선을 타고…](http://images.khan.co.kr/article/2008/02/19/20080220.02500114000003.01M.jpg)
서명수 감독의 ‘나비 두더지’는 ‘서브웨이 미스터리’, 조은희 감독의 ‘내부 순환선’은 ‘서브웨이 멜로’를 표방한 작품이다. ‘나비 두더지’는 40대 기관사(판영진)와 그의 아내(최정란) 등을 주인공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현대인의 삶을, ‘내부 순환선’은 이름이 같은 청년 기관사(배용근)와 DJ(양은용) 등을 통해 젊은이들의 사랑과 이별을 그렸다. 두 영화의 주요 배경은 서울의 지하철 2호선이다. ‘내부 순환선’과 달리 ‘나비 두더지’는 투신자살 등의 내용이 문제가 돼 서울메트로의 협조를 받는 데 4개월이 넘게 걸렸다. 서감독은 시나리오를 전면 수정, 주인공 직업을 택시기사로 바꾸기도 했다.
이한 감독의 ‘내사랑’도 2호선에서 찍었다. 세 커플 가운데 기관사 세진(감우성)은 지하철에서 우연히 알게 된 주원(최강희)과 사랑에 빠진다. 이 밖에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 김성수 감독의 ‘영어완전정복’, 박흥식 감독의 ‘경의선’ 등도 지하철에서 맺어지는 사랑을 그렸다.
‘경의선’의 남자 주인공(김강우) 직업도 기관사다. 그와 대학 강사(손태영), 상처받은 두 남녀의 심신이 치유되는 과정을 그렸다. 사고장면 때문에 도시철도공사 측은 처음에는 협조를 거부했지만 나중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녀(전지현)와 견우(차태현)의 첫 만남은 지하철에서 이뤄진다. 그녀가 오바이트를 하고 그녀의 친구로 오인받은 견우가 수습을 하면서 인연을 맺는다. 이 장면은 구로 차량기지에서 찍었다. 주행 중인 것처럼 기차를 흔들고, 차창 바깥으로 블루 스크린을 부착한 뒤 찍은 장면과 훗날 촬영한 외부 장면을 합성했다. 군인들의 발걸음을 놓고 두 남녀가 손가락으로 상대의 이마를 때리는 장면은 분당선에서 찍었다. 제작진은 지하철이 가는 방향에 구애받지 않기 위해 지하철 내부 좌우를 대칭되게 꾸며놓고 10시간 동안 촬영했다.
‘영어완전정복’에서 문수(장혁)가 영주(이나영)에게 빨간 구두를 신겨주면서 청혼하는 장면도 분당선에서 찍었다. 이에 앞서 문수가 영주를 찾아다니는 장면은 2호선에서, 영주의 머리카락이 출입문에 끼이는 초반 장면은 7호선 강남역에서 담았다.
서울메트로·도시철도공사·한국철도공사 등은 2006년을 전후로 영화 촬영에 관한 규정을 마련한 뒤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영상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에 장·단편 259편(544건)이 764일, 5000여 시간에 걸쳐 지원을 받았다. 최근 불거진 문제는 이 과정에 발생했다. ‘내사랑’ 측이 변경하기로 약조했던 화재 장면을 찍었고, 이같은 사실이 개봉을 앞두고 알려진 것이다. 서울영상위원회 측은 원만한 해결을 위해 서울메트로 측과 협의를 하고 있다.
# “아무도 없어요?”
‘나비 두더지’와 ‘내부 순환선’은 미국 뉴욕의 시라큐스영화제 등 해외에서 먼저 호평받았다. 두 영화 제작진은 “서울메트로 측의 지원 덕분에 극중 장면을 의도한 대로 찍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김상진 감독의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하이라이트는 500억원을 싣고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를 경찰이 헬리콥터 등을 동원해 추적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부산과 전라도, 강원도 일대에서 한달이 넘도록 찍었다.
여러 장면 가운데 달리는 기차 위에 있는 근영(유해진) 도범(강성진) 종만(유건)의 모습은 블루 스크린과 강풍기를 동원한 뒤 기차를 흔들어서 찍었다. 종만이 다리 위를 달리던 기차에서 떨어질 뻔한 순간 촬영은 와이어를 이용했다. 그런데 와이어를 매고 떨어지는 연기에 몰입했던 유건은 어느 순간 정적이 감도는 걸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준비 시간이 길어지자 유건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제작진이 모두 식사를 하러 가버린 것이다. 유건은 제작진이 돌아올 때까지 와이어에 매달려 남모를 고통을 치러야 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하이라이트인 기차터널 앞 장면은 경남 진주∼사천 구간에서 찍었다. 비가 오지 않아 무려 3주를 기다려야 했던 제작진은 결국 살수차를 동원해 물을 뿌려가며 촬영했다. 당시 기온이 영하 10∼15도. 땅속으로 스며든 물이 얼면서 지반이 팽창, 기차운행이 염려돼 제작진은 화염방사기로 언 곳을 녹여야 했다. 하루 촬영이 끝나면 물탱크에 남아 있는 물을 버려야 했다. 물탱크가 얼면 다음날 살수차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버린 물로 인해 주변의 5년생 사과나무들이 얼어죽어 제작사는 이 비용을 물어줘야 했다. 사흘로 예정됐던 촬영은 열흘 만에 끝났다.
장항준 감독의 ‘라이터를 켜라’는 철도청의 협조를 받아낸 뒤에 본격 기획됐다. 극중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기관실·특실·일반실 등 4량의 기차 내부는 2억5000만원을 들여 세트로 만들었다. 촬영 당일 서울역이 공사 중이어서 출발 장면을 부산에서 찍었다. 제작진은 미술작업을 통해 부산역 플랫폼을 서울역으로 둔갑시켰다. 대전·천안·울산 등 각 역 장면은 협조받은 기차가 제조회사별로 매번 달라 촬영지 이전 역에서부터 미술작업을 해 동일한 기차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에서 제대한 막둥이(한석규)는 기차를 차고 귀가한다. 이 장면은 촬영 당시 수해로 철로가 끊기는 바람에 급히 계획을 바꿔 경기 연천역에서 찍었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영호(설경구)가 철교에서 자살하는 건 강원도 정선에서, 철교 아래 냇가 장면은 충북 제천에서 찍어 합성했다. 냇가 장면은 물을 막고 진행 중인 철교보강공사를 중단시키고 담았다. 김대승 감독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우(이병헌)와 태희(이은주)가 대화를 나누다 키스할 때에 기차가 지나간다. 스태프들은 기관사에게 통사정, 출발을 20분 정도 늦추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