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때 영어포기” 이나영 대사는 제작자 고백
‘영어? 될 때까지 밀어붙이기!’ ‘영어? 내가 완전히 정복해주마!’. 영화 ‘영어완전정복’(2003) 홍보 문건이다. 새 정부의 이른바 ‘영어 몰입 교육’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제 나라 국어를 밀쳐놓고 영어에 몰입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 ‘영어완전정복’ 뒷이야기를 소개한다.
# “데시근? 슈메르?”
아이에게 알파벳을 가르치는 문수(장혁)와 영주(이나영). 새 정부의 영어 교육 강화로 ‘영어 유치원’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등 영어 열풍이 더욱 거세지는 현상을 예감한 듯하다.
‘영어완전정복’은 한국사회의 영어강박증을 소재로 한 코미디다. 주인공은 한 외국인 때문에 곤혹을 치른 동사무소 공무원 영주(이나영)와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간 여동생과의 만남을 앞둔 백화점 구두 매장 직원 문수(장혁). 영화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영어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영어든, 사랑이든 ‘열린 마음’이 열쇠라는 주제를 담았다.
시나리오 작업에 걸린 시간은 1년여. 작업 당시 김감독과 시나리오작가들은 영어회화학원을 수시로 방문, 수강생들을 인터뷰했다. 제작진의 경험담도 반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데시근’ ‘슈메르’ 등. 디자인(design)을 ‘데시근’, 서머(summer)를 ‘슈메르’로 읽고 창피를 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례는 시나리오 완고에선 빠졌지만 고졸 출신 직장인들의 경험담이다. 국문학과 출신인 조민환 대표는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털어놨다.
“중학교 영어수업 첫시간에 곧장 교과서로 진도를 나갔어요. 알파벳은 가르쳐 주지 않고. 첫 시험 때 대부분 100점인데 저는 88점을 받고 선생님에게 모욕적인 꾸중을 들었어요. 친구들의 조롱감이 됐고요. 이후 영어가 싫었고, 반항심에 영어 선생님들도 멀리했어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것도 영어를 하기 싫어서예요.”
이 일화는 ‘영어완전정복’에 반영됐다. 여주인공이 “영어 못하는 게 왜 창피해요”라면서 “영어 못한다고 덜 떨어진 인간 취급하는 우리나라가 미친 거예요. 전 중2 때 영어 포기했어요. 그래도 국어는 100점 받은 적 있어요”라고 항변하는 대목이다.
# “뭘 보여줄까?”
주인공은 이나영이 먼저 확정됐다. 김감독은 TV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등을 보고 그가 순진하고 엉뚱한 영주 역에 적격이라고 결정했다. 문수는 덜렁이에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남자. 김감독은 장혁을 선정했다.
그런데 장혁은 액션영화에 출연하는 줄 알았다. 그는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등 김감독의 전작을 감안, 오디션을 앞두고 태권도·절권도·권투 실력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안을 찾았다. 하지만 기획 중인 작품은 코미디. 장혁은 ‘화산고’ 때 생각이 났다. ‘화산고’ 제작자 차승재 대표(싸이더스FNH)가 장혁에게 참고하라면서 준 작품은 만화 ‘허리케이즌’. 장혁은 이를 감안, 6개월간 권투를 연마했는데 주어진 작품은 권투와 거리가 먼 코미디·액션·SF ‘화산고’였던 것이다.
또 한명의 주인공은 호주 여배우 안젤라 켈리이다. 김감독은 호주 에이전시에 공문을 보낸 뒤 40명을 추천받았다. 이들을 20명으로 추린 뒤 현지로 가 오디션을 봤다. 이 자리에서 한번도 한국어를 접해본 적이 없다는 안젤라를 캐서린 역에 뽑았다. 이어 한국말 특별훈련을 실시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중단했다. ‘간장공장 공장장이 장 공장장이냐 간 공장장이냐…’ 등 한국인도 쉽지 않은 대사를 술술 해낸 것이다.
이같은 사전 제작 과정에 가장 심기가 불편했던 이는 김감독이다. 많은 영화인들이 액션영화로 주목받은 김감독이 코미디를 연출하는 걸 반대했던 것이다. 김감독은 이에 대해 “반대가 심할수록 오기가 났다”고 털어놨다.
# “한국말 아름다워요”
‘영어완전정복’은 한국 코미디 영화의 외연을 넓혔다. 봇물을 이룬 ‘조폭 코미디’가 아닌 영어를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를 선보인 것이다. 나아가 다양한 패러디와 영상 기법으로 화제를 낳았다. 영주의 개성은 애니메이션, 사람들이 영어회화학원에 등록한 이유는 다큐멘터리, 영화회화 수준은 게임, 영어문답 강박증은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는 팬터지, 출연진의 속마음은 말 풍선을 이용한 자막으로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I Love You Long’(나는 자기 사랑하지롱) ‘It’s Carrot’(당근이지) 등 이른바 콩글리시로 폭소를 낳았다.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특수효과 장면도 돋보였다. 특히 영주가 거리에서 문수가 아닌 사람을 문수로 착각하는 장면은 국내 영상기술의 쾌거로 손꼽힌다. 영주 주위로 수십명의 문수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제작진은 이에 대해 “장혁씨가 각기 다른 동선에 따라 다양한 표정·동작을 지으면서 60번 넘게 걸었고 그때마다 블루 스크린이 따라다녔다”면서 “그렇게 찍은 것중 40개 정도를 영주의 모습과 합성했다”고 밝혔다.
극중 백미는 문수가 영주에게 지하철에서 빨간 구두를 신겨주면서 청혼하는 장면이다. 영주가 “문수씨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영어로 프러포즈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문수는 “사랑이란 말은 우리말이 더 좋다”고 답한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영화가 끝나면서 화면 왼쪽의 작은 창을 통해 소개되는 영화 이후 이야기에서도 나온다. 요리사 병우(정석용)는 영어 강사 캐서린과 결혼,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는다. 캐서린은 “서방님~ 간장공장 공장장이 좋아요…”라고 물은 뒤 관객을 향해 “한국말 정말 아름다워요”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