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 정창영 전 연세대 총장, 전군표 국세청장,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 돈 때문에 온 나라가 바람 잘 날 없다. 속담에 ‘돈이 말을 하면 진실이 침묵한다’고 했다.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타짜’ ‘범죄의 재구성’ 등 한국영화 가운데에는 돈을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 적지 않다.
# 500억원을 만들어라
유괴·납치 사건과 돈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대표적인 최근작으로 지난 추석에 선보인 김상진 감독의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권여사(나문희)가 자식들에게 요구한 돈은 무려 500억원. 이 돈은 권여사와 3인조 납치범(강성진·유해진·유건)이 기차를 타고 달아나는 장면 등에 나온다. 제작진은 이 돈을 만들고 사용하는 데 애를 먹었다.
컨테이너 하나에 꽉 찰 만큼 실린 이 돈 뭉치는 둘레가 15ｍ 남짓. 무게는 5.57t에 달했다. 이 돈은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만든 게 아니다. 제작진은 만원권 지폐 500만장을 한달 동안 만들었다. 극중에 나오지 않았지만 원래 시나리오에 돈 뭉치가 날리는 장면이 있어 실제와 유사한 지폐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작비용으로 1500만원이 소요됐다.
제작진은 돈을 만들기 전에 한국은행의 허가를 받았다. 앞면에 영화용 소품이라는 걸 알 수 있도록 영화사 이름과 전화번호를 표기했다. 소품용이라는 표시를 하지 않을 경우 위조지폐로 사용될 여지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다 만든 뒤에는 그 많은 돈을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기차 장면을 찍은 한달 동안 자동차에 싣고 다녔다. 촬영을 마친 뒤 폐기할 때에는 그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 한국은행에 증거로 제출했다.
# 진짜와 가짜 돈 혼용
최동훈 감독의 ‘타짜’(2006)와 ‘범죄의 재구성’(2004)을 찍는 데에도 많은 돈이 사용됐다. ‘타짜’에 나오는 돈은 80억원 정도. 이 가운데 60억원 정도를 1000만원을 들여 만들었다. 나머지 20억원은 ‘범죄의 재구성’에서 창혁(박신양) 일당이 은행을 터는 장면 때 사용한 것을 재활용했다.
두 영화의 돈은 같은 만원권이지만 인쇄된 글귀가 다르다. ‘타짜’의 윤지호 소품팀장에 따르면 ‘타짜’의 만원권 앞뒤면에는 눈에 띄게 빨간색으로 ‘견본’이라는 낱말이, ‘범죄의 재구성’ 앞면에는 ‘영화촬영협조용’이라는 문구가 인쇄돼 있다. 앞서 소개했듯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에서는 영화사 이름과 전화번호를 통해 소품용임을 명기했다.
이렇듯 세 작품의 내용이 제각각이다. 이에 대해 윤지호 팀장은 “지정된 문구가 있는 게 아니라 소품용으로 만든 것이라는 표시만 드러나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타짜’에서 고니(조승우) 등이 노름할 때 카메라에 담긴 돈은 실제 만원권으로 500만~700만원 정도가 사용됐다”면서 “소품용으로 만든 돈은 노름장·박스 등에 쌓아 놓은 데 사용했다”고 밝혔다.
사실 영화사(싸이더스FNH)에서는 ‘범죄의 재구성’에서 만든 소품용 돈을 훗날을 예상하고 보관해 놓은 게 아니다. ‘타짜’ 제작 당시 ‘범죄의 재구성’에서 사용한 돈을 고스란히 다시 쓰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타짜’와 ‘범죄의 재구성’의 이석원 PD는 “두 영화의 감독과 제작사 및 주요 스태프들이 거의 동일해 옛날 돈을 재활용하면서 감회가 새로웠다”고 회상했다.
# 돈을 갖고 찍어라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따르면 돈을 소재로 한, 돈이 제목에 들어간 장편 영화는 10편쯤 된다. 가장 오래된 작품은 이명우 감독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 이밖에 ‘돈과 시간을 달라’(김원태·1958) ‘돈’(김소동·1958) ‘자식복 돈복’(윤대룡·1959) ‘돈바람 님바람’(김수용·1963) ‘종자돈’(김진규·1967) ‘돈에 눌려 죽은 사나이’(심우섭·1971) ‘돈아돈아돈아’(유진선·1991) ‘돈을 갖고 튀어라’(김상진·1995) 등이 소개됐다. 필름이 보존돼 있는 작품은 ‘돈바람 님바람’ ‘돈에 눌려 죽은 사나이’ ‘돈아돈아돈아’ ‘돈을 갖고 튀어라’ 등 4편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돈을 갖고 튀어라’는 돈을 소재로 한 포스터로 화제를 낳았다. 돈에 파묻혀 웃고 있는 두 주인공(박중훈·정선경), 산타클로스 복장으로 돈다발을 둘러맨 박중훈, 만원권 지폐로 온몸을 두른 정선경의 모습 등이다. 이 돈은 물론 극중에 나온, 달수(박중훈)와 은지(정선경)가 차지하는 돈 3억원은 소품용으로 만든 것이다. 김상진 감독은 “신고·폐기 절차를 몰라 임의로 만들었는데 인쇄소에서 거절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면서 “뒷면에 소품용이라고 적고 촬영을 끝내자마자 그 자리에서 불태우겠다는 약속을 한 끝에 완성했다”고 털어놨다. “컴퓨터그래픽 기술도 따라주지 않아 포스터용 사진도 소품용 돈을 사용해 직접 찍은 것”이라고 소개했다.
〈배장수 선임기자 cameo@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