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김민희가 시나리오 작업 중 담배를 피고 있다. 배우들은 골초 연기를 잘 해내는 데 몰두한 뒤 금연을 하느라 애를 먹고는 한다.
영화상에는 흡연 장면이 곧잘 나온다. 이때 피우는 담배는 극중인물의 캐릭터에 맞춰 정해진다. 배우의 흡연 여부에 따라 극중인물의 캐릭터가 바뀐 경우도 적지 않다. 담배 연기(煙氣)는 연기(演技)에 활용되기도 한다.
# 담배와 캐릭터
‘뜨거운 것이 좋아’(감독 권칠인)에서 시나리오작가 아미(김민희)는 ‘레종’을 피운다. 권칠인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 당시 담배의 종류를 정했다. 권감독은 “감독들은 대개 담배·휴대폰 등 소품을 캐릭터에 맞춰 미리 품목을 정한다”면서 “레종(RAISON)의 경우 아미의 캐릭터와 제명에 담긴 ‘존재의 이유’라는 의미가 잘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무방비도시’(감독 이상기)에서 소매치기 조직 삼성파 사장 백장미(손예진)는 말보르 레드를 피운다. 백장미의 캐릭터에 따라 담뱃갑의 색깔이 강렬하고 담배 또한 독하다는 점을 고려한 선정이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감독 정윤철)에서 수정(전지현)이 담배를 피우는 것도 방송사 PD인 그의 직업과 성격에 맞춰 설정한 것이다.
‘무방비도시’에서 백장미는 꼭 황금빛 금장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색상과 디자인이 화려하고, 뚜껑을 닫을 때 명쾌한 소리가 나는 이 라이터는 백장미의 캐릭터를 설명해 준다. 훗날 백장미와 조형사(김명민)를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이 라이터는 90만원짜리 듀퐁이다. 제작진은 이 제품을 협찬받아 사용한 뒤 돌려주었다.
‘더 게임’(감독 윤인호)에서 강노식(변희봉)은 담배를 피울 때 독특한 습관을 지녔다. 늘 똑같은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낸 다음 필터를 아래로 향한 뒤 바닥에 두세 차례 톡톡 두드리고, 반드시 성냥으로 불을 지핀다. 이 모습은 드라마 전개의 중요한 단서이다.
# 흡연 연기는 고역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아미(김민희)는 골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여관방을 비롯해 자기 방과 술집 등에서 담배를 달고 살다시피 한다. 완소남 승원(김성수)을 만나 금연을 결심한 뒤 이내 번복, 쓰레기통에 버렸던 담배를 찾아 맛있게(?) 피운다.
김민희는 흡연연기 때문에 고역을 치렀다. 가수 지망생인 애인 원석(김흥수), 언니 영미(이미숙), 승원 등과 함께하면서 담배를 피울 때에 많게는 한번에 두 갑 정도를 피워야 했다. 한 장면도 풀 쇼트(Full Shot), 클로즈업, 리버스 앵글 쇼트(Reverse angle shot) 등 여러 커트(Cut)로 구성돼 그 때마다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다. 전후 장면과의 연결 등을 고려, 더러 적당히 자른 다음 피우기도 했지만 연기를 하면서 구토 등에 시달렸다.
‘소름’(감독 윤종찬)에서 선영(장진영)도 애연가다. 장진영은 담배 연기가 푸르스름한 조명에 일자로 뻗어나가는 연기 등을 하면서 하룻밤에 담배를 세 갑 넘게 피웠다. 동시녹음이어서 히터를 틀어놓거나 차창을 내리고 찍을 수 없던 자동차 내 흡연 장면 촬영은 장진영의 구토 증세로 몇 차례나 중단해야 했다.
# “담배도 못 피운다고?”
차태현은 담배를 피울 줄 모른다. 무명 시절 담배를 못 피운다는 이유로 구박을 많이 받았다. 신인으로서 기본을 갖추지 못했다고. 그러나 스타가 된 뒤에는 담배를 못 피우는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어진 배역마다 원래와 달리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인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는 ‘엽기적인 그녀’(감독 곽재용)에서는 일명 ‘뻐끔담배’를 피웠다. 촬영장에는 폭소가 만발했다. 그러나 애써 찍은 이 장면은 러닝타임에 밀려 편집 때 잘리고 말았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제작진은 전지현을 캐스팅한 뒤 마음을 졸였다. 선영이 담배를 안 피우는 인물로 바꿔달라고 할까봐. 그러나 기우였다. 전지현은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저 타르 담배로 흡연 연기를 해냈다.
배우들은 담배를 눈물연기에 활용하고는 한다. ‘아메리칸 드래곤’(감독 랄프 해미커)에서 박중훈은 울분이 끓어오르는 연기를 더욱 실감나게 하기 위해 불붙은 담배를 사용했다. 불붙은 담배를 눈가에 갖다 대 그 연기로 인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게 한 다음 감정을 끌어올려 비통함을 표출해 냈다.
# 장미 한 갑, 장미 한 송이
명계남이 1995년 연극 ‘콘트라베이스’를 하고 있을 때 일이다. 막이 오르기 전 담배가 떨어지자 명계남은 스태프에게 ‘장미’ 한 갑을 사오라고 부탁했다. 공연 준비로 경황이 없던 스태프는 소품으로 필요한 줄 알고 ‘장미꽃’ 한 송이를 사왔다. 5년여 장미만 피운 명계남은 다른 담배를 피우지 않고 그냥 무대에 올랐다.
이처럼 장미만 고집했던 명계남은 1999년 영화 ‘박하사탕’을 제작할 때는 1년여 동안 박하향이 들어 있는 담배만 피웠다. ‘박하사탕’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그는 또 ‘초록물고기’ ‘박하사탕’에 이어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제작할 때에는 담배를 슬림형으로 바꿨다. 이감독과 함께 작업하면서 담배가 떨어져도 서로 얻어 피울 수 있도록.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이미숙은 담배를 짧게 피운다. 그는 2년 전에 담배를 끊었다. ‘라디오 스타’(감독 이준익)에서 안성기·박중훈은 담배 한 개비를 나눠 피운다. 이들 역시 오래전에 담배를 끊었다. 이상기 감독, 김승우 등 금연한 영화인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영화계는 금연율이 낮다. 이 때문에 영화사는 사무실을 옮길 때 금연빌딩을 기피한다.
〈배장수 선임기자 cameo@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