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어때!] 상림, 낙엽비 젖은 천년숲 흐린 길 느리게 걷네](http://images.khan.co.kr/article/2006/11/01/6a0282a-center.jpg)
올해 단풍은 유난히 더디다. 때깔도 예년 같지 않다.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데, 이러다 겨울이 성큼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소리없이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경남 함양의 상림(上林)으로 갔다. 상림은 백운산 자락에서 발원한 위천을 따라 폭 80~200ｍ, 길이 1.6㎞로 조성된 인공숲. 아직 속을 다 태우지 못한 활엽수가 바람에 잎을 떨어뜨려 낙엽길을 만들었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숲길이다. 물안개 피는 아침, 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동화 속 세상에 와 있는 듯 몽환적 분위기에 취하기 십상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정자와 누각이 세워진 함양은 선비의 고장이다. 이런 연유 때문일까. 당대에 이름을 떨쳤던 문장가가 둘씩이나 이곳 함양을 거쳐 갔다. 실학자이자 소설가인 연암 박지원과 신라시대 문장가 고운 최치원이다.
박지원은 이곳 함양 땅에 국내 최초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고, 최치원은 함양태수 시절 지금의 상림을 조성했다. 그 숲이 1100여년째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늘 마을 곁에 있었기에 그 역할을 모를 이유도, 낯설지도 않은 숲은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버텨왔다.
마을에 숲이 조성된 것은 신라 진성여왕 때. 당시 군민들은 장마철이면 범람하는 위천 때문에 비가 조금만 와도 밤잠을 설쳐야 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최치원이 둑을 쌓고 물길을 돌린 뒤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은 게 효시다.
당시 ‘대관림(大館林)’으로 불렸던 숲은 그 길이가 4㎞. 이후 세월이 흘러 윗숲(上林)과 아랫숲(下林)으로 나누어졌고,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하림은 몇 그루의 나무만이 남아 지난 세월을 증거할 뿐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된 6만3000여평의 숲에는 120종 2만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상림은 계절에 따라 신록과 녹음, 단풍과 눈꽃으로 아름다운 숲의 정수를 보여준다. 산책로는 밀림이라고 해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우거진 숲길. 고개를 들면 하늘마저 숲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낙엽 밟는 소리, 다람쥐 재롱, 붉은 비단을 깔아놓은 것 같은 꽃무릇, 신라의 숨결 등이 태초부터 하나였던 것 같은 정겨운 모습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순박한 자연미 그대로다.
장구한 역사를 지닌 만큼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도 적지 않다. 최치원이 뱀을 보고 놀란 어머니를 위해 주문을 외워 현재까지 뱀과 개구리 등 양서류와 개미, 파리 같은 곤충이 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하루 만에 나무를 해왔는가 하면 금호미로 하루 만에 숲을 만들었고, 숲을 만들 때 많은 비가 내려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를 쳐서 물길을 돌려주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재미를 떠나 최치원 선생의 효심과 애민정신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숲은 마을에 있는 숲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상림 역시 세월을 거치면서 마을과는 한 몸이 된 지 오래다. 마을 주민들에게 숲은 나무, 꽃과 함께 종합휴식공간인 셈. 숲의 나무는 대부분이 활엽수림이다. 때문에 상림의 단풍은 들뜸이 없는 은은한 아름다움이 절경이다. 또 3000평의 잔디광장과 다볕당은 함양 문화예술의 주무대다.
숲을 거닐다보면 만나는 것이 이은리석불과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 척화비, 함화루, 초선정, 사운정, 루정각, 만세기념비, 독립투사 기념비, 역사인물공원 등. 숲과는 연관성이 없는 것들이지만 옛 선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화재들이다. 루정각에 오르니 시심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숲은 산책하는 동안 물소리와 새소리를 끊이지 않고 들려줘 싱그러움과 아늑함에 이내 빠져든다. 올해 새롭게 단장한 지압보도는 국내 최고 시설. 연못과 분수대, 물레방아 등이 조화를 이룬 상림이 ‘웰빙숲’이라는 별칭을 얻은 게 괜한 얘기는 아닌 듯싶다.
이즈음 맨발로 숲길을 거닐면 낙엽비를 맞으며 바람에 낙엽 구르는 소리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숲 동쪽 산책로를 따라 2만여평에 조성된 연밭도 장관이다. 열대수련원, 수생식물원, 백련지, 홍련지 등 300여종의 연꽃이 한여름 뙤약볕에 자태를 뽐낸다.
숲은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온화하게 보듬어 준다. 이른 새벽 물안개를 헤치며 산책나온 노부부, 조깅하는 사람, 사진찍는 사람,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 벤치에 앉아 책읽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등 숲과 어우러진 풍경이 낯설지 않다.
올해 상림 단풍의 절정은 중순께부터 말까지. 더불어 12월 초까지 바스락거리는 낙엽길이 이곳을 찾은 외지인을 반긴다.
〈함양 글·사진 윤대헌기자 caos999@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