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어때] 전북 고창 ‘학원농장’](http://images.khan.co.kr/article/2007/04/11/0834661125.jpg)
보리는 겨울을 밭에서 난다. 한파를 이겨낸 여린 잎은 언 땅을 뚫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보리가 잎을 세우면 봄이 머지않은 것. 이 때문일까. 보리는 강인하게 짙고 푸르러 들뜸이 없다. 남쪽이 봄꽃으로 부산한 이즈음 고창은 초록 일색. 봄볕에 무릎까지 웃자라 바람에 출렁이는 보리물결이 눈부시다. 다음주면 곡우. 봄비가 내려 백곡(百穀)이 윤택해진다니 보리의 때깔도 날로 선명해 봄향기가 가득하다. 잿빛 도심을 벗어난 초록세상, 보기만 해도 가슴이 후련해진다.
미당 서정주의 고향땅인 전북 고창은 ‘태양 아래 보리마을’이다. 고창의 옛 지명인 모양현의 ‘모(牟)’가 보리이고 ‘양(陽)’은 태양을 뜻하니 문자 그대로 보리가 잘 자라는 고장인 셈. 예부터 보리를 많이 심었고, 농사 또한 잘된다.
고창에서도 보리밭의 중심은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 노령산맥이 호남을 가르며 서해로 뻗어 내린 끝자락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 청보리가 물결친다. 눈을 돌려 이리저리 둘러봐도 온통 보리밭 뿐이다. 그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고, 배고픈 시절의 슬픈 기억도 향수가 된다.
쪽빛 하늘을 이고 광활하게 펼쳐진 연초록 보리밭은 자그마치 30만평.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드넓다. 보리는 봄볕에 무럭무럭 자란다. 다 자란 보리는 1ｍ 정도. 4월 초 이삭이 나오기 시작해 입하(5월6일)를 전후해 가장 푸르다. 5월 중순께 누렇게 때깔을 바꿀 때까지 그 푸르름이 눈앞에 가득하다.
남녘은 이미 매화, 동백, 산수유, 벚꽃, 배꽃으로 봄맞이가 한창이지만 고창은 초록이 봄색. 싱그러운 연초록으로 봄풍경의 극치를 내보인다.
학원농장은 진의종 전국무총리와 부인 이학 여사가 1960년대 초 야산을 개간해 설립한 농장이다. ‘학이 날아드는 곳’이라 학원농장이라 이름 붙였다. 이후 뽕나무, 목초, 보리, 수박, 땅콩 등을 재배해 땅을 일궜고 장남인 진영호씨가 물려받아 보리와 콩 등을 대량으로 심었다. 농약을 쓰지 않고 재배한 보리 수확량은 연간 5000가마. 그 풍광에 반한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농장이 관광지가 됐다. 이를 지켜 본 주변 농가들도 앞다퉈 보리를 심었다. 2004년에는 정부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인정해 전국 최초로 ‘경관농업지구’로 지정했다.
신록이 오기 전, 광활한 보리밭은 초록의 선명함이 더하다. 마치 드넓은 초원을 보는 듯 수수한 자연미는 보는 이의 가슴에 고스란히 담긴다.
14일 축제를 앞두고 성급한 마음에 길을 나선 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보리밭으로 나섰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는 마냥 즐거운 듯 해맑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팔짱을 낀 채 밀어를 속삭이며 유유히 걸어가는 연인들의 모습도 정겹다. 연방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작가들은 덩달아 분주하다.
그 모습에 반해 보리밭으로 들어섰다. 40㎝를 웃도는 ‘울창한’ 보리밭에 지그재그로 만들어놓은 산책로를 따라갔다.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지고 한 구절의 시구도 아련히 떠오른다.
연초록 보리물결이 바람에 일렁일 때마다 몸도 마음도 따라 움직인다. 바람에 실려 온 향긋한 풀향기가 코끝에 맴돈다. 황톳길 흙냄새도 구수하다. 농장에는 방죽과 황토집, 원두막도 들어서 있다. 하얀 냉이꽃과 보라색 제비꽃이 보리 틈을 비집고 뽐내는 자태가 앙증맞다.
언덕 제일 높은 곳에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 올랐다. 거칠 것 없는 드넓은 보리군락은 ‘초록의 바다’라 불러도 좋을 듯싶다. 그 능선 또한 아름다워 마음을 빼앗기기 십상이다. 보리밭 한가운데 들어선 한 그루의 소나무도 한결 운치가 돋보인다.
보릿대가 허리까지 차오르면 푸른빛은 더욱 선명해질 터. 바람 따라 보리밭의 빛깔 또한 다채롭다. 짙고 연한 초록의 스펙트럼으로 색잔치가 펼쳐진다.
5월 중순부터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드는 보리밭은 6월 초 수확기를 맞는다. 수확을 앞둔 황금빛 물결도 장관이다. 9월엔 메밀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봄이면 황홀한 연초록으로 가을이면 온 산을 뒤덮는 메밀꽃으로 천하 절경을 이루니 보는 것만으로도 잊혀진 고향을 떠올리게 만든다.
〈고창|글·사진 윤대헌기자 caos999@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