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한 안개에 갇혀버린 도시 샌프란시스코. 우뚝 솟은 다리의 교각만이 그곳이 강이라는 걸 짐작케 한다. 살아있는 거라곤 비행선을 따라 날아가는 철새들 뿐. 안개 속에 가려진 세상은 범죄와 타락이 꿈틀대고 있다. 안개를 걷고 세상에 내려오니 아니나 다를까 금방이라도 강간과 살인을 저지를 상황이다. 여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막 옷을 벗기려는 순간, 여자는 남자를 제압한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강력계 여자경관이 될 제시카(애슐리 쥬드).
‘블랙 아웃’은 제시카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범을 쫓는 스릴러다. 어찌된 일인지 제시카가 정신을 잃고 나면 그와 관계한 남자들이 시체로 발견된다. ‘원 나잇 스탠드’ 이었든 ‘과거의 애인’ 이었든 상관없다. 강력계에서 맞게 된 첫 사건. 아버지 파트너였고 강력계의 대부인 존 밀스(사무엘 잭슨)의 든든한 후원 덕에 수사는 계속된다. 그렇지만 이렇다할 단서조차 발견하지 못한다.
파트너인 마이크(앤디 가르시아) 역시 그를 독려하며 함께 사건을 파헤쳐 나간다. 그러나 문제는 본인이다. 그는 경관이었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함께 자살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살인자의 자식으로 자신에게도 살인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에 하루도 술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
살인 사건과 범인 못지않게 인간적인 고뇌가 한 축을 이룬다. 거울 앞에선 제시카는 내면과 외면이 분리된 자아분열까지 경험하며 자신의 피와 살인자의 피를 대조하기에 이른다. 과연 그는 무의식중에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제시카를 모함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며 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은 흡사 다중인격을 떠올리게 한다. 붙잡은 범인이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라며 누구나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음을 일깨우는 대사는 제사카를 더욱 혼란 속에 빠뜨린다. 하지만 영화는 전체적으로 스릴러의 재미를 놓치고 있다. 범인을 유추해 가는 과정부터 단정까지를 보여주기보다는 설명으로만 일관한다. 마지막 범인이 드러나는 과정 역시 개연성이 부족해 충격적인 결말도 인상적인 스릴러도 되지 못하고 만다. 중간 중간 흘려놓은 단서들 또한 관객들의 시선이 아닌 연출자의 눈높이에 맞춰져 관객이 그 단서들로 범인을 추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처럼 내내 지루한 반복을 일삼고 만다. 괜찮은 스릴러 만나기가 힘든 까닭을 새삼 실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의 연출자인 필립 카우프만 감독작. 12월 3일 개봉.
〈스포츠칸/김용필|영화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