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으로] ‘천년학’, ‘가슴 시린 영상’큰 울림 긴 여운](http://images.khan.co.kr/article/2007/04/11/7d1292c.jpg)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본 느낌을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말로 형용하기에는 영화적 깊이가 너무 깊고 일상적으로 쓰는 찬사를 사용하기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내포돼 있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잠시 여유를 갖고 마시는 잘 우려낸 차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켜켜이 쌓인 토양을 밑거름 삼아 비바람과 땡볕 등 각종 난관을 겪으며 깊은 맛을 갖게 된 좋은 차를 마실 때의 긴 여운이 가슴속에 느껴진다.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 문법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14년 전에 나온 ‘서편제’의 연속 선상에 위치한 이 영화는 함께 자랐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눈먼 소리꾼 송화(오정해)와 그의 노래에 맞춰 북을 치는 고수 동호(조재현)의 가슴 시린 사랑을 그린다. ‘서편제’가 경지에 오르려는 소리꾼들의 불타는 예술혼을 그렸다면 ‘천년학’은 예술 이전의 인간이기에 느껴지는 개인적인 감정에 초점이 맞춰진다.
송화와 동호의 사랑의 표현 방식은 일반적이지 않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인 송화는 끝없이 팔도를 돌아다니고 동호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누이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두 사람은 힘들게 만나고서도 자신의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뿐,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가슴을 후벼파는 판소리가 이들의 심정을 대변해준다. 평생을 그리워하면서도 함께 있을 수 없는 남매의 운명적인 사랑의 감정이 쌓이고 쌓여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임감독의 영혼적인 동지인 정일성 감독이 잡아낸 한국의 자연은 역시 탄사를 자아낸다. 낙조에 붉게 물든 바닷가에서 해풍에 몸을 누인 소나무와 갈대밭, 흐드러지게 핀 매화꽃 등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배우들은 영화의 주인공이라기보다 배경이고 자연이 주인공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오정해는 더욱 깊어진 눈빛으로 송화 역할은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조재현은 자신의 연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절제된 연기로 영화의 중심축을 잡는다. 영화 내내 두 배우 간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은 관객들의 감정을 쥐락펴락 움직일 정도로 호소력 있다.
요즘 관객들이 보기에 극 흐름이 너무 잔잔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줄거리를 쫓기보다 영화 속을 흐르는 한의 정서를 느끼려 노력한다면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임감독의 101번째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최재욱기자〉
